사회적 죽음으로 세상보기

[정신의학신문 : 마인드랩 공간 정신과, 이광민 박사] 

 

N번방 사건

순간 얼어붙었습니다. 단편적인 정보만으로도 내용을 깊게 들여다볼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소위 N번방 사건에 대해 느끼는 첫 감정은 비슷할 겁니다. 어떻게 어린 여성을 대상으로 이렇게 잔혹할 수 있는지, 처음에는 극단적인 범죄 집단의 소행일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주요 가해자로 언급되는 걸 보니 평범해 보이는 청년에, 사회복무요원에, 복무 중인 군인에, 미성년자라고도 합니다. 이런 끔찍한 범죄의 가해자가 우리 주변에 있을 것을 생각하면 충격입니다. 게다가 관련된 유료 가입자가 수만 명이라고 하니, 이건 개인의 일탈 범위를 넘어 사회적 문제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심각해질 때까지 왜 이 범죄행위의 폭주를 막아낼 수 없었을까요.
 

사진_픽사베이


사건의 특징

N번방 사건을 들여다보기 위해 이번 사건과 관련된 몇 가지 특징을 생각해보았습니다.
 

1) 사회적 사각지대를 만들어 낸 폐쇄적 디지털 환경

이번 사건에서 정보, 영상을 주고받은 사이버 환경은 특별합니다. 텔레그램이나 다크웹은 다른 인터넷 환경보다 익명성이 높고 폐쇄적입니다. 특히 다크웹은 관련 지식이 없으면 찾아서 들어가기도 어렵습니다. 여러 범죄 행동을 해도 흔적이 남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사회적인 법규가 미치지 않는 어둠의 세계에서 내면의 극단적인 욕구를 표출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을까요. 서로 가면을 쓴 채, 무슨 짓을 하더라도 들키지 않을 거라고 믿는 비밀스러운 공간이 사회적으로 왜곡된 환경을 만들어 냈습니다.
 

2) 피라미드식으로 서열화된 집단

이런 비밀스럽고 폐쇄적인 환경에, 등급에 따라 피라미드식으로 서열화된 집단이 만들어졌습니다. 소위 방장으로 언급되는 상층부가 범죄행위를 주도하고, 가상화폐로 내는 금액이나 범죄행위에 가담하는 정도에 따라 높은 조직으로 올려줍니다. 수만 명에 이르는 참여자들은 이 피라미드 조식 내에서 더 높은 집단에 소속되기 위해, 자신의 개인정보와 가상화폐를 내고 범죄행위에 동참합니다. 결국, 그 집단에서 성적 범죄행위는 일반화된 형태이자 공동의 목적으로 인식되어집니다.
 

3) 착취적이고 가학적으로 왜곡된 성 인식

이렇게 모인 집단은 성 착취 영상의 제작과 공유에 목적이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범죄적인 성 영상물을 나누는 것을 넘어서, 극단적으로 왜곡된 성 관념이 들어 있는 착취적이고 가학적인 영상을 만들어 냈습니다. 언론에 언급된 내용만으로도 가해자들의 왜곡된 성 인식은 비정상적인 수준이었습니다. 이런 비정상적으로 왜곡된 성 인식을 주요 가해자가 주도하고 그 집단 내의 수만 명의 참여자가 그대로 쫓아가며 공유했습니다.
 

4) 주요 가해자의 어린 나이

사건이 밝혀지며 주요 가해자의 나이가 비교적 어리다는 게 알려지면서 우리의 생각은 더 혼란스러워졌습니다. N번방 사건은 이제까지 우리가 알던 잔혹한 범죄 집단과 달랐습니다. 미성년자를 포함해 우리 주변에서 언제든지 마주칠 수 있는 학생과 청년이 이 사건의 주동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여자까지 생각한다면 더 어린 학생들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왜곡된 성 인식에 다수의 미성년자와 청년이 익숙해져 있는 건 아닌지, 그렇다면 N번방 다음에는 또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걱정스럽습니다.

 

관계와 소통에 기반한 성관계

성관계는 기본적으로 애정에 기반한 남녀 간의 소통 행위입니다. 서로의 동의하에 자신과 상대방에게 성적인 만족을 전달하기 위해, 서로 맞춰 주려 노력하는 “관계 행동”입니다. 한쪽 입장의 일방적인 행위가 아니라 상호 간의 “소통 행위”입니다. 통상적인 소통과 공감, 관계의 경험이 없다면 성관계는 왜곡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 관련 행동에서 관계가 아닌 일방적인 강압이 있다면, 그 순간 성 행동은 폭력이 됩니다. 일방적인, 폭력적인, 가학적인 성행위를 욕구로 추구하고 있다면 서로 간의 동의가 있건 없건 성 인식에서 비정상적인 왜곡이 있는 셈입니다. 

 

관계 경험의 부재

저는 이번 사건의 가담자들이 과연 정상적인 이성 간의 관계 경험을 가졌던 적이 있을지 의심스럽습니다. 이 정도로 파괴적이고 왜곡된 성적 욕구를 추구하고 있다면, 소통과 관계에 바탕을 둔 남녀 간의 관계 경험을 가지지 못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일방적으로 상처를 주고받는 관계만을 경험하며 왜곡된 성 관념을 가졌을 수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소통이 없이, 단순히 자신의 성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수단으로 성 행동을 이어갔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왜곡된 성 인식은 이성 간의 소통을 방해하고, 관계를 지속하기 어렵게 하고, 자신을 더욱 고립되게 만듭니다.

 

사회적 감시망의 붕괴

다만, 이런 왜곡된 성 인식이 왜 집단적으로 퍼졌을지는 사회적으로 고민이 필요합니다. 정상적인 사회에서는 설령 일부가 왜곡된 성 관념을 가지고 있더라도 사회적 자정작용을 통해 정상적인 인식으로 조정되어 갑니다.

사회관계 속에서는 일정 부분 사회의 안전을 유지하기 위한 사회적 감시망이 있습니다. 일탈 행동이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켜 나와 내 가족,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가 될 수 있다면, 그걸 막아내기 위해 서로 노력하게 됩니다. 문제를 공개적으로 알리고 조사나 처벌이 이루어지도록 합니다.

하지만 이번 사건에서는 이러한 감시망이 사건이 한참 진행된 이후에야 작동했습니다. 수만 명에 이르는 N번방 참여자 사이에서 일어났어야 할 사회적 감시망은 작동되지 않았고, 오히려 피해자의 지인들이 분투하며 사회적으로 알렸습니다. 집단 내에서 감시망이 작동하지 않은 이유를 살펴본다면 폐쇄적이고 은밀한 사건의 환경도 있지만, 집단적으로 공유된 인지 왜곡을 주된 이유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진_픽사베이


성 인식에 관한 집단적인 인지왜곡

집단의 힘은 의외로 무섭습니다. A라는 인식을 가진 다수의 “집단 A” 내에 B라는 인식을 가진 소수의 “집단 B”가 들어오면, “집단 A”가 가진 정보의 편향성으로 인해 점점 A라는 인식이 전체로 공유되어 버립니다. 큰 집단이 가지는 사고의 영향을 작은 집단이 받는 셈입니다. 그렇기에 집단의 대다수가 사회 전체를 위한 정상적인 인식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번 사건에서는 N번방이라는 집단 내에서 오히려 부정적인 방향으로 집단의 인지 왜곡이 진행되었습니다. 성 관념이 극단적으로 왜곡된 구성원이 모여 폐쇄적이고 은밀한 집단이 먼저 만들어집니다. 그 집단 내로 일부 왜곡이 덜한 사람이 들어오더라도, 그 폐쇄적인 집단 내에서 공유된 극단적인 정보와 영상에 영향을 받습니다. 피라미드식 구조를 통해 추가적인 혜택까지 주어지게 되면서, 집단 전체가 가지는 인지의 왜곡은 더욱 심해집니다.

이러한 상황은 과거와 현재 속에 존재해온 극단적인 정치 집단이나 다단계 사기 집단의 형태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집단적 인지 왜곡이 이번 N번방 사건에서도 유사하게 발생했습니다.

 

사회 전체의 문제

다만, 왜 큰 사회의 힘이 N번방 사건을 미리 방지하지 못했느냐는 여전히 숙제로 남습니다. 아무리 N번방이 폐쇄적인 환경이라 하더라도, 극단적 범죄가 지속하는 상황에서 전체 사회는 이 문제를 간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사회 전체가 가진 성 관념도 일정 부분 왜곡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확히는 성 관련 범죄에 대해 가볍게 생각하는 인식이 저변에 깔려 있습니다. 

사실 N번방 사건은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규모나 사건 정도가 조금 다르다 뿐이지, 100만 명 회원의 불법 디지털 성범죄 사이트인 소라넷 사건이나 자살로 생을 마감한 연예인의 권력형 성폭력 사건 등 이전에도 유사한 상황은 이어져 왔습니다. 우리 사회는 그때마다 일부 단편적인 처벌을, 그것도 솜방망이식 처벌로 상황을 때워왔습니다. 심지어 연예인의 성폭력 재판에서 심각히 낮은 수준의 성인지 감수성을 드러낸 판사에게 N번방 사건의 재판을 맡기려 했던 건, 우리 사회 전반이 가진 성 인식의 문제를 고스란히 드러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회적 죽음

성 관련 집단적 인지 왜곡이 발생하기 좋은 환경이 있습니다. 바로, 관계와 소통이 배제된 폐쇄적인 환경입니다. 폐쇄적인 환경에서는 나와 그 집단 내의 우리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N번방에서도 그렇지만 그 집단 내에서 나와 또 다른 내가 있을 뿐, 피해자는 없습니다. 피해자나 그 주변 사람의 관점에서 조금이라도 생각해본다면 보일 수밖에 없는 끔찍한 상황이, 가해자 집단 안에 갇혀 생각하면 보이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해서 이해하고 생각하는 것은 일종의 공감 능력입니다. 관계와 소통이 배제되면 공감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나밖에 생각하지 않는, 일방적이고 단편적인 관계에만 익숙해져 있는 “사회적 죽음”은 N번방과 같은 집단적 인지왜곡을 가지기 좋은 환경을 만들고 있었던 셈입니다.

 

젊은 나이에 나타난 성 관련 인식의 손상

N번방 사건을 특히 심각하게 바라봐야 하는 건 가해자의 어린 나이입니다. 우리 주변에 있을 법한 청소년과 젊은 층에서 N번방 사건을 주도했고 퍼져있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왜곡된 성 관념이 사회 전반적 문제가 되어버렸다는 방증입니다.

이번 사건이 일부 개인의 극단적인 일탈 행위로 치부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사회가 이전부터 지금까지 문제를 키워왔다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어 왔는지 돌아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성범죄를 처벌하고 예방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도 중요하고, 어린 시절부터 상호 관계에 따른 바람직한 성 관념을 가질 수 있는 현실적인 교육을 마련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일부 극악한 범죄 집단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 있을지도 모를 그 누군가, 그것도 비교적 젊은 나이의 누군가가 왜곡된 성 관념을 가지고 은밀하고 폐쇄된 집단 내에서 성범죄를 저지르고 있었다는 것이 N번방 사건의 핵심입니다. 무서운 건 지금의 상황이 지속할 때 나타날, 그다음의 N번방입니다. 어린 나이에 성 관련 인식이 손상된 현실이 우리에게 던지는 경고 메시지를 더는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이광민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마인드랩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경북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박사, 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임상교수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 상담심리학과 겸임교수
전체기사 보기
저작권자 © 정신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