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온안 정신건강의학과의원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1.

어버이날은 부모님의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 드리는 날이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엄마 아빠 사랑해요’라며 카드를 쓰고, 색종이를 오려 만든 카네이션을 가슴팍에 붙들리는 날이다. 타향살이에 연락도 없던 이 땅의 수많은 아들 딸들이 머쓱함을 견디고 안부 전화를 드려보는 날이다. 

우리는 모두 초등학교, 유치원 때부터 배워왔다. 부모는 우리를 세상에 존재하게 해 준 것 하나만으로도 평생 감사해야 할 존재이다.

우리는 부모를 사랑해야만 한다. 아니, 우리는 분명 부모를 사랑한다.

 

2.

“어렸을 때 엄마와 난 사이가 좋았다. 난 엄마를 사랑했다. 엄마와 인사도 하고, 같이 놀고.”
“하지만... 난 더 이상 엄마의 아들이기 싫다. 다른 누군가의 아들일 수는 있지만 엄마의 아들이긴 싫다.”

칸이 사랑한 감독, 자비에 돌란이 19세에 만든 영화 [아이 킬드 마이 마더(I Killed My Mother)]는 어머니에 대한 증오의 고백으로 시작한다.

감독이 직접 연기한 캐릭터 ‘후베르트’는 어머니를 증오한다. 그는 어머니의 모든 것이 싫다. 어머니가 먹는 모습, 하는 말들, 말하는 목소리, 옷 입는 것,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꼴 보기 싫다. 악마 같은 여자라며 소름 끼쳐한다. 어머니와 이야기하는 것은 마치 벽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만 같다. 소통은 없고 억압과 간섭뿐이다. 불경스러운 영화의 제목처럼 후베르트는 엄마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아이 킬드 마이 마더]라는 영화 제목은 우리나라에서 번역이나 의역 없이 영문 발음 그대로 개봉했다. 확실히 [나는 우리 엄마를 죽였다] 같은 한글 제목으로는 프랑스의 젊은 천재 감독이 담아내는 그 감각적인 맛을 살리기가 어려울 것 같긴 하다. 하지만 배급사가 제목을 굳이 번역하지 않았던 무의식적인 이유에는 어쩌면 ‘어머니를 죽인다’라는 말에 담긴 힘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를 죽인다는 말이 자극하는 우리들 모두의 무의식 깊은 곳 무언가에 대한 두려움 말이다.
 

사진_픽셀


3.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정신과를 찾는 많은 사람들은 어머니를 미워하며 고통스러워한다. 단지 부모에게 버림받거나 학대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겉보기엔 평범한 양육환경에서 자라났다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어머니에 대한 증오를 털어놓는다. 때로는 어머니가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밉다고 이야기한다. 어머니만 아니었으면 인생이 더 행복했을 것이라고 눈물을 흘린다.

그러면서도 어머니와 분리되지 못한다.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싫어하는 어머니를 한편으로는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스러워한다. 


“엄마한테 많은 걸 바라는 것도 아니에요. 우리 엄마가 제발 그냥 남들 엄마 같기만 했으면 좋겠어요.”

어머니와의 관계로 힘들어하는 많은 환자들이 이렇게 이야기하곤 한다. 어머니에게 대단한 희생이나 사랑, 유산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한 어머니였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지금처럼 자식의 인생을 간섭하고, 자식의 인생을 갉아먹고, 자식의 인생에 짐으로 끼어드는 엄마가 아닌 평범한 엄마 말이다. 자식을 사랑하되 자식을 놓아줄 수 있는 엄마. 자식을 위해 희생할 수 있되 자신만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엄마, 그런 엄마를 원하며 눈물을 흘린다.

 

4.

부모를 향한 분노의 표면에는 ‘분리’의 문제가 있다. 사람들은 대개 부모와 분리되고자 하는 본능적인 욕구가 좌절될 때에 분노하기 때문이다. 부모의 반대로 하고 싶은 일이 가로막힐 때에, 부모가 저지르는 일들의 뒤치다꺼리를 끝없이 감당해야 할 때에, 부모가 던지는 가시 돋친 말들에 상처 받을 때에 분노한다.

영화 속 주인공 후베르트도 마찬가지이다. 남자 친구를 이해하지 못하는 엄마, 제멋대로 아들을 기숙학교로 보내버리는 엄마, 함부로 거친 말을 내뱉는 엄마에게 후베르트는 분노한다. 엄마로부터 분리되지 못하는 삶에 분노한다.

하지만 막상 그런 이들의 삶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그들 스스로조차 쉽사리 자신을 부모와 분리시키지 못한다. 지긋지긋한 부모로부터 분리되어 자신만의 삶을 되찾고자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다시 부모와의 그 끈끈한 듯 질척질척한 관계로 되돌아간다.

그들은 불안해한다. 부모와 분리되고 싶어 하지만 한편으로는 정말로 분리되어 버릴까 봐 불안해한다. 부모에 대한 사랑과 애착까지 모조리 잘라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한다. 분리되는 것은 곧 사랑받을 수 없고 사랑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불안하다. 부모를 증오하고 또 사랑하며 쳇바퀴처럼 고통받는다.

 

5.

“난 엄마를 사랑한다. 하지만 아들로서의 사랑이 아니다.”
“모르겠다. 누가 엄마를 해친다면 난 당연히 그 사람을 가만 안 둘 거다.”
“하지만 나는 엄마를 그다지 사랑하지 않는다.”


후베르트는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혼란스러워한다. 사랑하는 마음과 미워하는 마음 사이에서 스스로도 갈피를 잡지 못한다. 이는 단지 후베르트가 질풍노도의 시기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영화는 후베르트를 상담해주는 선생님 역시 어머니와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면서 이 문제가 평생을 이어갈 수 있음을 암시한다.

후베르트나 선생님의 영화 속 이야기만이 아니다. 부모와의 갈등으로 정신과를 찾게 되는 사람들에게만 국한되는 이야기도 아니다. 사실 우리 모두의 무의식 깊은 곳에서는 부모에 대한 증오가 깃들어 있다. 

 

6.

모든 부모 자식 간의 관계에서는 사랑과 증오가 시루떡처럼 켜켜이 쌓여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은 시간과 함께 뒤섞인다. 모순된 감정이 구분할 수 없이 뒤섞이며 애증(愛憎)이라는 모호한 감정으로 이름 붙는다.

그 과정의 핵심은 부모와 자식이 서로 상대에게 자기 자신을 투영한다는 사실에 있다. 자식은 부모에게 자기 자신을, 부모는 자식에게 자신의 일부를 투영한다.


누구나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나고, 어머니의 품 속에서 자라난다. 사랑과 증오, 슬픔과 행복의 모든 감정을 어머니와의 교감에서 배우고 키워낸다. 그 과정은 아이가 자신의 일부를 어머니에게 투영함으로써 얻어진다. 결국 우리는 누구나 아주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에게 나를 투영하던 습관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어머니에게서 나를 찾고자 한다.

마찬가지로 모든 어머니는 아이를 뱃속에 잉태하여, 품으로 길러낸다. 부모에게 아이는 자신들의 일부를 덜어 창조해낸 존재나 다름없다. 부모 역시 아이에게서 자신을 찾고자 한다. 아이를 바라보며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을 본다.

그러나 결국 부모는 자식이 아니며 자식은 부모가 아니다. 그 근본적이고도 당연한 진실 앞에서 증오와 사랑이 필연으로 뒤섞인다. 서로가 서로의 또 다른 ‘나’이기 때문에 사랑할 수밖에 없지만, ‘나’와 다를 수밖에 없는 상대를 보며 증오할 수밖에 없다.

우리 모두는 어머니를 사랑하지만 미워한다. 분리되고 싶지만 분리될 수 없다. 부모 자식 간의 관계는 필연적인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7.

후베르트는 결국 영화의 막바지까지 어머니와 화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애증을 오가며 어머니에게 사랑한다며 고백한다. 어머니 또한 ‘오늘 내가 죽으면 어떡할래!’라며 쏘아붙이고 뒤돌아서는 아들 뒤에서 ‘그럼 나는 내일 죽을 거야’라며 읊조린다. 후베르트와 어머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사랑한다.


필연적인 모순에 맞서는 유일한 방법은 모순을 껴안는 것이다. 사랑하지만 미워할 수 있다는 것. 죽도록 밉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는 것. 그 모순을 껴안을 수 있어야만 혼란을 비켜갈 수 있다.

어머니와 분리된다는 것이 곧 ‘연을 끊음’은 아니라는 것. 무조건적인 희생만이 사랑을 유지하는 방법은 아니라는 것. 나는 어머니와 다르지만, 어머니는 나의 일부라는 것. 나 또한 어머니의 일부이지만 어머니는 나와 다르다는 것. 그 모순된 사실들이 공존할 수 있음을 확인해야만 관계를 비로소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분리와 함께함이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사진_픽사베이


8.

어버이날은 부모님의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 드리는 날이다. 부모의 숭고한 사랑과 은혜를 되새기고 감사드리는 날이다. 붉은색 카네이션의 꽃말은 ‘사랑’이지만 노란색 카네이션의 꽃말은 ‘경멸’이라고 한다. 어버이에 대한 사랑은 너무나 복잡하고 오묘하여 사랑의 모든 면면에 증오가 묻어 있을 수밖에 없다.

때문에 어버이의 사랑을 되새김은 나도 모르게 무의식 깊은 곳의 분노를 부추길 수 있다. 하지만 그 모든 모순의 필연성을 인정하고 마음 깊이 받아들일 수 있을 때,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부모 앞에 진정한 자식으로 마주설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버이날과 어울리지 않는 불경한 제목의 영화 [아이 킬드 마이 마더]의 첫 장면 삽입 문구를 마지막으로 어버이 날을 기려 본다.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여
헤어짐의 뒤에야 우리는 비로소 그 사랑을 깨닫는다”

- 기 드 모파상 (Guy de Maupassant)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온안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전공의
한양대학교병원 외래교수
저서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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