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이일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세상에는 많은 어긋남이 존재하고 있다. 우리가 어떤 명제를 생각하면 쉽게 진리로 받아들이게 되는데,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그 어떠한 명제도 절대적일 수 없다. 특히나 언어로 표현되는 순간 그 한계는 더 명확해진다. 언어로 표현되는 순간, 세상에 존재하는 무언가가 한 번 왜곡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흔히 속담에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지혜가 담겨 있다고 한다. 그 지혜를 이번 기회에 한 번 살펴볼까 한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 어떤가? 많이 접해왔고, 큰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맞는 말이다. 그러면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어떤가? 이것도 많이 접해왔고 맞는 말로 여겨진다. 그런데 두 속담을 한꺼번에 보면 어떻게 여겨지는가?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나? 어쩌라는 거지? 사람들과 함께 하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이럴 때 할 수 있는 말은 컬투의 철 지난 유행어밖에 없다. ‘그때그때 달라요.’ 

우리는 언어로 표현되는 순간, 그 말이 진짜라고 생각한다. 진짜라고 생각해서 표현했기 때문에, 표현되는 순간 더 진짜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것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무한히 돌 수 있는 고리가 되어 확증편향이 된다. 이렇게 확실하지 않은 것들이 확실한 것인 양 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고 있다. 확실하지도 않은 것들이 확실한 것처럼 행세하면서 서로 균열을 일으키는... 이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어긋남’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사진_픽사베이


말이 길었다. 그래서 펭수와 카피츄는 왜 떴냐고!!!??? 상기 이유 때문이다. 세상에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어긋남을 가장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방법이 펭수와 카피츄 같이 캐릭터화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캐릭터화는 둘의 공통점이다. 그리고 그 캐릭터는 실제와는 다르다.

펭수가 일반 성인임에 대해 우리는 명확히 알고 있다. 하지만 10살짜리 펭귄으로 포지셔닝을 해서 받아들이고 있다. 카피츄가 유튜브를 통해 수익을 창출하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산에서 내려온 욕심이 전혀 없는 남자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 실제와 가상의 혼재를 통해 ‘세상의 어긋남’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돈을 밝히는 것을 추한 것으로 여기고, 대놓고 그런 것이 표현되면 쉽게 비난을 한다. 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돈을 원한다. 속을 까뒤집어보면 많은 사람들이 돈을 밝힌다. 그러면서 비난을 하고 있다. 결국 누워서 침 뱉기가 되는 거다. 우리는 이러한 어긋남을 감내하며, 외줄 타기 하듯 위태롭게 살아가고 있다. 들키지 않아야 하고, 들킨 사람들은 비난해야 하고, 그래서 더더욱 들키지 않아야 하고. 이것이 얼마나 답답하고 불안한 상황일까... 모두 알지만, 표현될 수 없었던.
 

카피츄


그런데 이것을 카피츄가 해내고야 말았다. 영상을 보면, 카피츄는 대놓고 돈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끝까지 자신은 ‘산에서 내려온 욕심이 전혀 없는 남자’라고 우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우김을 웃음으로 받아준다. 우리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카피츄가 표현하고 있는 어긋남이 우리네 모습이라는 것을. 카피츄가 그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에서 한 발짝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다.

한번 상상을 해보라. 카피츄가 그렇게 대놓고 광고를 하면서, ‘욕심 없는 남자’라는 캐릭터가 없었다면? 아마도 엄청난 거부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지금의 카피츄는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카피츄는 그러한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 때마다 스스로를 민망해한다. 그것이 또 웃음이 되어 돌아온다. 우리는 그 안에 ‘어긋남’의 문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카피츄가 순수 창작물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같은 문법이다. 빌 게이츠는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새로운 조합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했다. 결국 음악도 세상에 존재하는 코드의 조합일 뿐이다. 아주 아주 엄밀한 의미에서 순수 창작물은 존재할 수 없다. 그렇다면 창작물과 표절 사이에는 스펙트럼이 생길 수밖에 없고, 그 애매한 지점에서는 ‘창작물이냐, 표절이냐’라는 경계에 머물 수밖에 없다. 그 경계의 지점은 사람마다 기준이 다를 것이고, 어긋남은 필연적으로 따라올 수밖에 없다.

그래서 카피츄는 대놓고 표절을 한다. 그리고 캐릭터로서 우긴다. 자신은 산에서 내려왔기 때문에 기존 음악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그래서 표절은 불가능하다고. 그래서 순수 창작물이라고 우긴다. 하지만 우리는 다 알고 있다. 그것이 창작물일리 없다는 것을. 그 어긋남 속에서 우리는 재미를 느끼는 것이다. 
 

펭수


펭수도 똑같은 문법을 취하고 있다.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너무나도 많이 깎이고 깎여서 점잖게 살고 있다. 하지만 마음 안에는 모두 욱하는 마음과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하고 싶은 욕구가 살아 숨 쉬고 있다. 하지만 ‘성인’이라는 이름하에 그러한 마음들은 단단한 상자에 꾹꾹 눌러 담아 숨겨야 한다. ‘성인이니까 성인답게 행동해야지.’도 맞는 말이지만, ‘하고 싶은 말은 하고 살아야지’도 맞는 말이다. 우리는 이 어긋남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펭수는 사람이 아니다. 게다가 10살이다. 10살짜리 펭귄에게는 그 어긋남이 어그러질 수 있다. 성인이 아니니까. 게다가 사람도 아니니까. 그래서 허용되는 욱함과 할 말 다하는 모습이 우리에게 대리만족을 주는 것이다. 

 

세상에는 많은 어긋남이 존재하고 있다. 이것을 발견하고, 거기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크리에이터로서의 성공 비결이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 할리우드에서 날라 온 영화 ‘기생충’의 성공 신화도 이 ‘어긋남’을 다뤄준 데에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다음 글에서 다뤄보겠다). 여러분도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수많은 ‘어긋남’들을 찾아보면 어떨까? 분명 성공은 거기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이일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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