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온안 정신건강의학과의원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진 KBS

 

이미 누구나 눈치 채고 있는 사실이지만, 트럼프는 무척이나 나르시시스틱(Narcissistic)해 보인다.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은 빌딩에서부터 와인과 생수에까지 빠짐없이 각인된 ‘TRUMP’라는 글귀가 그의 넘쳐흐르는 자기애를 펄럭인다. ‘TRUMP’ 일색인 그의 사업은 연못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 홀딱 반해 자기 자신과 사랑에 빠졌다던 나르시스를 연상시킨다. “넌 해고야”를 외치는 자신만만한 그의 눈빛에서 ‘나만이 최고야’라는 전능감이 내비친다.

전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억만장자에 이어 미국의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트럼프는 분명히 승승장구해왔다. 가히 아메리칸 드림의 현신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눈여겨 볼 만한 점은 유일한 진리이자 정답인 ‘나 자신’을 잣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트럼프의 철학이, 아주 칼 같은 실무율을 따른다는 것이다. 승리하거나 패망하거나. 최고이거나 최악이거나. 끌어안거나 내치거나.

트럼프는 월가가 아닌 부동산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만큼, 두둑한 배짱과 카리스마로 늘 상대방을 눌러야만 하는, 그래서 반드시 이겨내야만 하는 패턴에 아주 능숙하다. 부동산 업계의 특성상 실패는 패망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트럼프는 스스로 확신하고 있다. 승패의 날카로운 칼날을 걷는 것만이 인생일진대, 자신은 언제나 승리한 쪽을 쟁취해왔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그의 인생을, 그의 자아를 지탱해주는 가장 큰 지지축일 것이다.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에서 패트릭은 친구들과 모여 앉아 서로의 명함을 자랑하며 으스댄다. 남들이 보면 똑같아 보이는 명함들을 모아놓고 자신의 명함이 실리안 레일 폰트를 사용했다는 둥 상아빛 재질을 썼다는 둥 휘황찬란한 디테일들을 뽐낸다. 명함을 내보이며 자신의 완벽함에 도취되어 있던 패트릭은 그러던 중 친구 폴이 주고 간 명함을 꺼내보고는 아연한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득의양양하던 차도남 패트릭은 심하게 흔들린다.

“아니... 환상적인 색채와 품위 있게 두툼한 글자체... 세상에 이것 봐 워터마크까지...”

딱딱하게 굳어버린 패트릭은 순식간에 폴에 대한 질투로 불타오른다. 자신만이 가장 완벽하고 멋진 남자임을 믿어 의심치 않던 패트릭은 명함 한 장에 끝도 없는 열등감으로 휩싸여 버린다. 자신의 존재가치가 바닥으로 떨어져 버린 것 같은 수치심과 질투심으로 가득 찬다. 결국 그는 폴을 집으로 불러들여 그의 머리를 도끼질 해버린다. 잔인하게 그를 살해하며 피투성이가 된 채로 패트릭은 다시금 자신의 우월함과 자존감을 만끽한다.

 

자기애적인 사람들은 가장 큰 특징은 그들이 ‘외부의 확인을 통해 자존감을 유지’하려는 시도를 중심으로 성격이 조직되어 있다는 점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인하기를 원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자기애적 인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 확인의 주체가 오로지 자아의 바깥에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자신의 자존감과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도구’로서 여기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자아가 자신의 자존감 조절을 위해 찾아 헤매는 이러한 도구적 대상을 자기심리학에서는 ‘자기대상(self object)’라 일컫는다. 자기대상은 그것이 자아의 본질을 정의해주는 존재(self definition)인 동시에 자아의 바깥에 있는 객체(object)라는 데에 의의가 있다. 그리고 자기애적인 사람들은 이러한 자기대상에 대한 필요가 과도하여 그 이외의 가치관이 왜곡되는 경우가 많다. 주변의 모든 인간관계와 가치관들이 그저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해주는 ‘자기대상’으로서만 도구적으로 기능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본질을 지키는 것이 너무나 힘겨워 다른 이들의 본질을 끌어안을 여유가 없다.

 

따라서 자기애적인 사람들은 끊임 없이 평가하고 등수매기기를 한다. 그 대상이 자기대상으로서 얼마만큼의 기능을 할 수 있는지, 얼마나 나의 가치를 잘 드러낼 수 있는 지 확인하기 위해 순위 책정에 여념이 없어진다. 또, 그렇게 등수가 매겨진 대상들은 최고로 이상화되거나, 최악으로 평가절하된다. 양극단의 평가로 대상들을 판가름하며 이상화된 대상들을 자신과 동일시하며 도취되고, 평가절하된 대상을 비하하며 자신의 우월감을 확인한다. 그렇게 그들은 사실은 열등한 자신의 자아를 메우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대상을 찾아 허덕인다. ‘아메리칸 사이코’의 패트릭이 완벽한 자신의 명함을 통해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인하지만, 그보다 더 멋진 친구의 명함을 보자 순식간에 반대로 폴의 명함이 이상화되며 좀 전까지 완벽했던 자신의 명함은 다시 평가절하하며 열등감에 휩싸이는 모습에서 자기애적인 사람들의 이러한 패턴을 아주 잘 확인 할 수 있다. 패트릭은 상류층 동료들과 무척 나이스하고 사교적으로 교류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서로가 서로에게 그저 ‘자기대상’으로서만 기능하고 있을 뿐이었던 것이다.

 

 

물론 자기애적 인격의 요소들이 마냥 병적인 것은 아니다. 병적인 자기애성 인격구조는 열등감과 과대감을 오가며 불안정한 자아와 왜곡된 인간관계로 고통 받지만, 비교적 건강하게 방어될 수 있는 자기애는 자신감 있는 모습과 인상적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을 각인 시킬 수 있다. 따라서 사회적 성공을 이뤄내는 데에 필수적인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아마 트럼프의 성공에는 이러한 요소도 분명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상대방이 자기대상으로서 기능한다는 것은 나를 칭찬해주고, 나의 자존감을 강화해준다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아가 상대방의 칭찬과 동경을 받기 위해 매력적인 모습을 호소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호소는 실제로 생산적이고 긍정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트럼프는 수조원의 재산을 불려냈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꿈과 비전을 제시했다. 비록 그것들이 트럼프의 자기대상으로서 기능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트럼프 그 자신이 자기애적 인격의 표상이 되었지만 동시에 스스로 대중들의, 사회의 자기대상으로서 기능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트럼프의 극단적인 행동과 거대한 성취는 대중들로 하여금 이상화와 평가절하를 오가는 극단적인 평가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대중이 트럼프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또한 대중들의 자기애적 면모가 풍기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트럼프를 이상화하고 동일시하며 그를 통해 자신의 자존감을 확보하고 있고, 다른 어떤 이들은 트럼프를 평가절하하며 자신의 도덕성과 합리성을 재확인하며 자기가치를 확인하고 있다.

정신분석에 영향을 받은 사회 이론가 들 중 Lasch나 Hendin과 같은 이들은 현대사회가 자기애적인 관심을 부각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과거 작은 규모의 공동체에 갇혀 생활하던 사회에서는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규모로 급변하는 현대사회의 단편적인 인간관계가 사회를 더욱 자기애적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진실성과 인간됨됨이와 같은 뜬구름 잡는 인간관계보다는, 보여지고 평가 받는 이미지만이 둥둥 떠오르는 변화무쌍한 현대사회의 피상적인 관계가 서로를 그저 자기대상으로서 이용하게 만든다.

현대인들은 서로에 대한 욕구는 깊지만 사랑은 얕아졌다. 수없이 북적대는 광장은 연일 아우성이지만 영혼은 찾아볼 수 없다. 그저 각자의 자기대상들만이 부표처럼 떠돌아다닌다.

 

물론 우리 모두는 자기대상을 필요로 한다. 자기 대상을 잃을 경우 삶에 무언가 빠져버린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가치관이 자기대상의 생산과 폐기의 반복에만 달려있는 자기애의 본질적인 약점은, 거기에 인성-사람다움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상대방이 단순한 나의 자기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존중 받아야 할 공감 받아야할 대상이라는 것을 살아갈수록 깨닫게 된다. 사람과 사람이 마주하며 우리가 바라보게 되는 것은 단순히 나를 바라보는 상대의 시선만이 아니다. 그 시선 너머의 사람, 내가 아닌 또 다른 존재의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존재 그 자체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급급하던 자아는 그렇게 나와 같은, 그렇지만 나와 다른 자아의 존재를 깨달으며 성숙한다. 자기애를 뛰어 넘는 성숙은 인간성과 인간성-자아와 자아의 접점에서 이루어진다.

 

내년이면 71세가 되어 미국 역대 최고령 대통령이 되는 트럼프에게 자기애적 관점을 벗어나 새로운 인격적 성숙을 이루어내기를 기대하기란 쉽지 않다. 무엇보다 미국의 대통령으로서 그의 그러한 인격과 태도가 득이 될지 실이 될지도 함부로 가늠하기 쉽지 않고 말이다. 그러나 트럼프라는 불세출의 인물을 탄생시킨 우리 사회가 점차 자기애의 바벨탑을 쌓아가고 있다는 느낌만은 지울 수 없다. ‘너’, ‘우리’가 지워지고 ‘나’의 모습만을 내세우고 순위 매기려 할수록 인간성의 실종으로 내닫고 있는 건 아닌지 우려스럽다. 진정한 ‘나’를 발견하고 ‘나’를 사랑하기 위한 길은 ‘너’를 이용하는 방편에서가 아닌 ‘너’와의 ‘만남’에서 탄생함을 되새겨야할 것이다.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온안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전공의
한양대학교병원 외래교수
저서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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