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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성 피로, 사실은 우울증?
김경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 승인 2019.11.24 05:49

[정신의학신문 : 김경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우울증을 겪는 걸 알아차리기가 생각만큼 쉬운 건 아니다. 정신건강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는데도 불구하고, 우울증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이 정말 많다.

통계적으로는 최소 열 명 중에 한두 명 이상은 우울증으로 추정되는데, 실제 병원에 가는 경우는 이보다는 훨씬 드물다. 특히 감정적인 슬픔이나 우울감은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고, 단지 축 쳐진 기분에, 늘 피곤하고, 식욕이 없고, 만사 귀찮아지고 짜증이 나며, 집중력이 떨어지는 등의 문제를 우울증의 징후라고 생각하는 게 그렇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가까운 이의 권유를 이기지 못해 병원을 방문한 환자들이 자신이 우울증이라는 진단 결과에 놀라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본다. 환자는 자신이 우울증이 아니라 그저 피로하고 힘이 없는 것뿐이라고 믿고 있다. 너무 과로한 탓이라고 가볍게 생각하고, 주말에 푹 자고, 푹 쉬면 괜찮아진다고 생각하지만, 아무리 쉬어도 피로는 풀리지 않는다. 경험 있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와의 짧은 면담과 간단한 지필 검사만으로도 정확히 우울증이라는 확실한 진단을 받게 되는 경우가 흔하다. 물론 실제 만성 피로 증후군(Chronic Fatigue Syndrome)이라는 질환명도 존재한다.

아래에 열거하는 증상들, 보통 우리가 만성 피로라 생각하고 참고 견디는 증상들이 사실은 우울증의 징후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두자.

 

사진_픽사베이

 

기분이 가라앉는다.

가장 명백한 우울증 신호이지만,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경우도 많다. 우울증에서 나타나는 기분 변화는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슬픈 기분만이 아니다. 저조한 기분, 잦은 기분 변동, 감정 기복, 쉽게 화내고 예민함, 허무함, 공허함, 외로움, 무서움, 두려움, 자신감의 부족 등의 모든 가라앉는(depressed) 형태의 주관적 정서가 포함될 수 있다. 일을 너무 많이 해서, 혹은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서 몸이 힘들다 보니 기분이 저조하다고 쉽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가라앉는(depressed) 감정 반응은 우울증의 두 가지 핵심 증상 중의 하나이다. 저조함의 정도, 기간, 일상생활에 그 감정이 미치는 범위나 강도 등에 대한 세세한 면담이나 관찰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

자신감이 없고, 매사에 부정적, 비관적인 견해가 강해지며, 자부심이 낮고 종종 자신이 가치가 없다는 느낌을 받는다.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를 비하하고 낮추어 보기 때문에 더욱 자기비판적이 되고 자신을 가혹하게 벌주려 하는 경향이 강해진다. 

이러한 기분이 가라앉는 현상은 아침에 특히 더 심해진다. 주간기분변동(diurnal variation)이라고 불리는 현상으로,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 최악의 저조함을 느끼며 “오늘 하루를 또 어떻게 보내나...” 한숨부터 나오고, 잠자리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고통스러움으로 다가온다. 이 또한 몸이 피곤해서, 아직 피로가 풀리지 않아서 그렇다고 오해하기 쉽다.

 

흥밋거리나 관심거리가 없어진다.

정신과 의사가 흔히 쾌감상실(Anhedonia)이라고 부르는 증상으로, 저조한 감정과 함께 우울증의 또 다른 핵심 증상이다. 남들이 즐거워하는 어떤 일에도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만사 흥미가 생기지 않고, 뭘 해도 재미를 느끼지 못하니 무기력하고 생기가 없으며, 세상이 마치 흑백화면처럼 무미건조하고 형편없이 느껴진다. 이 증상은 인간관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친구를 만나도, 동료와 대화를 해도 아무런 재미가 없다. 우울증을 겪는 사람이 고립되어 가는 이유이다. 타인과 어울리기 싫어하고, 외출하기도 싫어한다. 스스로에게도, 타인에게도 “피곤해서 그냥 쉬고 싶어서 그런다.”라고 변명하지만, 실제는 우울증의 핵심 증상이며, 심해지면 삶에 대한 미련마저 잃어버릴 수 있는 무서운 증상이다.

 

입맛이 이상하다.

우울증 환자는 종종 과식한다. 무언가를 먹는다는 행위 자체가 마치 항우울제처럼 중추신경계의 세로토닌 불균형을 일시적이나마 교정해주는 효과가 있다. Comfort eating(감정적 섭식)이라고도 하며,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기분이 좋지 않거나 화가 나서 먹는 행위를 의미한다. 때로는 신경성 폭식증 등 식이 장애로 발전하거나 식이 장애와 동반되는 경우도 흔하다. 입맛이 없어지는 경향도 있다. 음식의 맛이나 포만감, 먹는 행위 자체의 즐거움 등을 잃어버리는, 쾌감상실의 또 다른 사례이다. 먹는 게 귀찮거나, 먹어도 맛이 없거나, 아예 먹어야겠다는 의욕 자체를 잃는다.

 

성욕이 줄어든다.

쾌감상실이 성생활에도 영향을 미친다. 식욕 다음으로 중요한 인간의 기본 욕구인 것을 생각하면, 성욕에 영향을 받는 것은 전혀 놀라운 현상이 아니다. 모든 게 쓸데없어 보이고, 모든 게 무의미하다면 성생활도 마찬가지로 느껴질 것이다. 또한, 우울증은 스테로이드 호르몬의 과다 분비 등으로 인해 정상적인 성호르몬의 분비량에 변화를 일으킨다. 일부에서는 오히려 과도하게 성적인 즐거움에 집착하거나, 다소 변태적인 취향을 갑자기 나타내기도 한다. 우울증으로 인해 사라져 가는 모든 즐거움을 잃지 않으려 하는 무의식적인 저항일지도 모른다.

 

잠이 오지 않고 쉽게 피로해진다.

잠을 쉽게 이루지 못한다. 모든 무기력감이나 권태감, 무쾌감증 등이 만성 피로 때문이며, 푹 쉬고 나면 회복하리라 기대하지만, 푹 쉬지도, 푹 잠들지도 못한다. 우울증으로 인한 만성적인 긴장, 과각성 효과 때문에 잠을 쉽게 이루지 못하고, 어렵사리 잠들어도 자주 깨어나거나 새벽에 일찍 깨어나 다시 잠들지 못한다. 겨우겨우 어떻게 잠은 드는데, 새벽 4시만 되면 눈이 떠져서 아침까지 너무 힘든 시간을 보낸다는 환자가 많다.

 

몸이 여기저기 아프다.

우울증에 걸린 인체의 신경계통은 같은 고통을 더 민감하게 느끼게 한다. 신체적인 원인으로 설명할 수 없는 통증이 생기고 치료를 받아도 아픔이 사라지지 않는다. 요통, 관절통, 어깨나 등의 근육통 등이 흔하며, 통증의 극단적인 예로 다발성으로 전신에 발생하는 섬유근육통의 진단을 받는 경우도 있다.

 

건망증이 심해진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작용한다. 뭔가를 기억하려면 잠시라도 집중이 필요한데, 우울증 환자들은 계속해서 다른 생각이나 걱정이 강제로 끼어들어 뭔가를 기억하기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어떤 경우 만사에 대한 흥미와 의욕 부족으로 외부 정보에 아예 관심이 사라져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두뇌 회전 자체가 느려지고 판단력에 장애를 일으키는 등, 마치 치매와 같은 증세가 발생해, 가성 치매(pseudodementia)라 불리기도 한다. 일종의 기억 일반화(over-general) 경향이 생겨 지나간 일의 구체적인 정황을 기억하기 어려워지기도 한다. 문제 해결 능력이 전과 비교해 현저하게 떨어지기도 한다.

 

우유부단해진다.

자신감이 급락하고, 자기비판적이며 자신에게 가혹한 태도를 취하게 되면서 자신의 직감으로 결정을 내리는 과정이 방해를 받는다. 모든 것이 실패로 돌아갈 것이라는 비관적 사고가 지배적인 상황에서는 어떤 결정을 내리건 의미가 없다는 식의 생각도 크게 작용할 것이다.

 

쉽게 말하는 만성 피로, '너무 무리해서 그렇다, 좀 쉬면 나을 것이다'라고 항상 입버릇처럼 말한다. 물론 실제로 그런 경우가 있다. 그러나 우울증 등의 훨씬 더 심각한 상황이 단순한 피로의 증상과 혼돈되어 치료의 기회를 놓치는 상황은 없었으면 한다.

 

김경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info.psy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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