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김기자 제공

이 책은 현실 버전 ‘82년생 김지영’이다. 한 여성의 몸과 정신에 가해진 모든 일과 드러난 현상이 우리시대 병리의 축약판임을 그려낸 종합 보고서로, 성장제일주의 개발독재가 만들어낸 강남특구의 한 가정에서 폭력과 학대를 경험하며 자란 지은이가 병든 사회와 가정, 그리고 개인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물질만능주의에 찌든 아버지가 보여주는 아파트에 대한 집착, 여성혐오에 젖어든 엄마가 강요하는 외모에 대한 강박 …. 부모의 삐뚤어진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철저히 도구화된 딸은 결국 난치병에 걸린다.

 

지은이는 삶의 여러 고비에 등장했던 8학군 고교동창을 강남거리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 그의 결혼 실상을 알게 되며 자신의 과거를 돌이킨다. 남편의 가해로 이상심리를 보이며 대리만족을 얻기 위해 딸을 압박하는 동창의 모습이 자신의 엄마와 똑 닮아있는 것에 큰 충격을 받고, 강남이란 부촌에서도 어김없이 일어나고 있는 여성과 아동에게 가해지는 억압과 폭력에 대해 고찰하게 된다. 한국 땅을 관통한 역사적 사건들과 물질만능주의, 외모지상주의, 여성혐오 등 왜곡된 시대정신이 각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과 가부장적 독재통치방식이 가정에도 고스란히 적용되는 과정을 짚어나가며, 한 여자의 반평생을 담은 회고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많은 이야기가 담긴 책으로 여러모로 읽힐 수 있는 여지가 많다. 남성의 폭력과 위력으로 구성된 사회의 부조리와 부정의에 저항하는 개인의 처절한 투쟁기이자, 한국여성의 삶에 대한 사실적 보고서다. 자신의 준거집단에 의문을 가지게 된 강남 아파트단지 출신의 여자가 계층을 뛰어넘는 페미니즘적 각성을 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기다. 정상가족이라는 신화를 파괴하며 남성본위사회에서 겪은 성폭력을 까발리는 미투운동의 연장이기도 하다. 자신의 삶을 날것으로 드러낸 일종의 수기형식으로 섭식장애, 우울증, 섬유근육통 등 여성의 영육을 지배한 질병에 대한 투병기로도 읽힌다. 강남특구에 대한 문제의식과 더불어 한국 근현대사가 사회병리에 미친 영향에 대한 통찰도 군데군데 담겨있다. 지은이의 깊은 고뇌는 인간 본성과 악에 대한 고민과 탐구로 치닫는다.

 

여성의 몸에 가해지는 실제적 모욕과 폭력, 화학흡수체 생리대부터 의복관습 등 건강을 위협하는 각종 요소들이 어떻게 자신을 병들게 했는지에 대한 적나라한 고백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전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한 집안의 딸로, 여학생으로, 직장여성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여성이라면 피해갈 수 없는 경험의 촘촘한 나열은 ‘단지 운이 좋아 살아남았다’는 강남역 여성살해 추모집회의 구호를 떠올리게 한다. 한국사회에서 여자로 살아온 보편적 체험의 기술이라는 점에서 ‘82년생 김지영’의 실사판으로 보인다. 화려한 강남의 어두운 그늘을 드러내며 현실은 언제나 더 지독하고 잔인하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자신의 정신건강에 대한 솔직하면서도 객관적 서술은 한국판 ‘프로작네이션’이라 할 만하다.

 

중소벤처기업부와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에서 추진, 전담하고 서울인쇄정보산업협동조합에서 운영하는 서울을지로인쇄소공인특화지원센터의 우수출판 콘텐츠 제작지원사업 선정 작품이다. 이 사업은 올해 처음 시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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