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장재식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몇 해 전 딸아이와 싱가포르에 있는 유니버설 스튜디오에 간 적이 있다. 트랜스포머라는 3D 놀이기구를 탔는데 정말 스릴 넘치고 재미있었다. 그런데 혹시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가. 눈앞에서 로봇이 나를 공격하거나, 마치 로봇을 타고 비행을 하는 듯한 장면은 그저 연출된 것일 뿐 실제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 순간만큼은 긴장을 하며 마치 현실 속에서 생생하게 경험하듯 느끼고 있는 건 왜일까? 

 

인간의 이성은 생각보다 견고하지 않다. 감정이나 감각은 얼마든지 이성을 속일 수 있다. 그 감각이 강할수록 잔상이 오래 남아 한참 후까지 영향을 미친다. 어릴 적 공포영화를 보고 한동안 밤에 혼자 화장실에 가기 무서워한 적이 있다면 내 말이 이해가 될 것이다. 나는 ‘여고괴담’이란 영화를 대학생 때 봤으면서도, 한동안 밤에 혼자 공용화장실에 가는 것이 괜스레 무서웠다. 이성적으로는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내 몸의 감각은 이성에 앞서 나의 두려움을 일깨운다.

뇌과학적으로 이성이 작동하는 뇌의 회로는 감정회로보다 반응이 느리다. 감정은 순간적이고 본능적으로 작동하는 데 반해, 이성은 비교적 느리게 작동한다. 감정이나 감각 반응이 빠른 것은 인류의 생존을 위해 오랜 시간 발달되어 인간의 몸에 새겨진 것이 아닌가 싶다. 전쟁터 같은 곳에서는 작은 자극에도 본능적으로 민감하게 반응해야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동물적 감각이 필요한 것이다.

감정반응을 수반한 기억이 오래 지속되는 것도 같은 원리이다. 시험을 위해 달달 외운 지식은 휘발성이 강해 이내 사라지는 반면, 고통스러운 이별의 기억은 잊으려 아무리 노력해도 오랜 시간 지속된다. 특히, 행복한 감정보다 고통이나 두려움을 수반한 기억이 더욱 오래간다. 그 경험이 너무 강렬하여 오랜 기간 후유증을 남길 때, 우리는 그것을 트라우마라고 부른다.

 

정신과에서는 고통스러운 감정이나 두려움, 불안을 어떻게 치료할까?

첫 번째는 안전함을 반복 경험시켜 중화시키는 시도를 한다. 여고괴담을 보고 한동안은 밤에 화장실 가기가 무서울 수 있다. 하지만, 어쨌든 생리현상을 피할 수는 없으니 계속해서 가고, 그래도 실제로 귀신을 마주치기는커녕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을 반복해서 경험하면, 어느 순간 그냥 화장실을 아무렇지 않게 갈 수 있다. 같은 원리가 치료에도 이용된다. 예를 들어 고소공포증이 있는 경우라면, 처음에는 2층에 가는 것을 시도해보고 익숙해지면 3, 4, 5층으로 점차 난이도를 높여 경험하게 한다. 매번 불안하지만 실제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반복해서 경험하면 점차 두려움이 사라지게 된다. 공황장애, 광장공포증에서도 마찬가지 원리를 적용해 시도할 수 있는데, 이를 단계적 노출법이라 한다. 

다른 한 가지 방법은 몸의 감정이나 감각 반응을 약물로 억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무대 공포증이 있어 남들 앞에서 발표할 수 없는 경우 두려움과 불안 반응을 약물로 억제한 후 발표를 하게 하는 것이다. 긴장할 때 나타나는 불안 반응, 즉 두근거림, 떨림이 사라지면, 감정에 지배되지 않고 이성이 활발하게 작동하여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반대로 신체에 불안 반응이 일어나면, 이성적으로는 전혀 불안해할 필요가 없는 상황임에도 극심한 두려움을 경험하게 된다.

 

사진_픽사베이

 

액션 영화의 결말을 우리는 항상 알고 있다. 주인공은 아무리 위험한 상황에서도 절대 죽지 않고 끝내 악당을 물리친다. 하지만 뻔한 결말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 몰입할 수 있는 것은, 큰 화면과 압도적 사운드, 긴장을 고조시키는 화면구성과 음악을 통해 우리의 불안 감각을 최대한 자극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영화의 내용 때문에 스릴을 느낀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자세히 생각해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같은 내용을 책으로 본다면 그만큼 스릴을 느낄 수 있겠는가. 물론 인간은 상황을 보거나 듣기만 해도 실제 경험한 것처럼 반응하는 거울 뉴런이 있기 때문에 조금은 스릴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같은 내용이라도 책보단 TV, TV보단 홈시어터, 홈시어터보단 영화관, 영화관보다는 3D 체험관에서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지 않은가. 감각의 역할은 그만큼 크다.

 

인간은 언뜻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듯 보이지만, 생각보다 감정이나 감각에 의해 훨씬 더 많이 지배된다. 감정을 수반한 기억에 오래 휘둘리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감정 경험의 절대 크기도 의미가 있지만, 같은 크기라도 어릴 때일수록 더 깊이 새겨지기도 한다. 그래서 정신분석에서는 어릴 적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떠올려 접근하려 시도한다. 무의식적 감정반응에 더 이상 휘둘리지 않고, 내 마음을 현재의 합리적 사고의 영향력 아래에 두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인지행동치료, 명상요법, 수용전념치료 등 현대에 활발하게 이용되고 있는 심리치료들이, 감정반응을 진정시킴으로 무분별하게 휩싸이지 않게 하려는 시도를 한다.

감정은 인간을 얼마든지 속일 수 있다. 감정에서 스스로 헤어 나오기 힘들 때는 약물을 사용해서라도 그 감정에서 빠져나오도록 할 필요가 있는 이유이다. 실제 임상에서는 그런 경험을 자주 한다. 상황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도, 그저 항우울제만 복용했을 뿐인데 고통의 크기가 줄어들고 객관적이고 담담하게 상황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불과 얼마 전까지 자살 생각으로 가득했던 사람이, 그때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며 스스로 의아해하는 모습을 보는 건 정신과 의사만이 누릴 수 있는 보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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