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개성은 싫든 좋든 아이의 것이다. 어머니 마음에 안 든다고 바꾸려 해선 안 된다. 이건 횡포다. 만약 아이가 철이 들어 그런 자기가 싫고 불편하다면 그때 고치려고 노력할 것이다."

 

엄마와 함께 진료실에 들어온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있었다. 겨우 의자에 앉긴 했지만 어떻게 왔느냐는 질문엔 대답이 없었다. 벌써 얼굴이 발개지고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 하려고 애를 쓰는데 잘되지 않았다. 무척 내성적인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말은 없지만 아이는 나한테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름대로 자기 뜻을 전달하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엄마였다.

 

“글쎄 저렇다니까요. 반에서도 저래요.”

도저히 더 기다릴 수 없는 모양이었다.

“어릴 적부터 남 앞에선 말을 안 해요. 동네 아줌마가 ‘너 많이 컸구나. 몇 살이지?’하고 물으면 그만 내 뒤에 숨기부터 하는 걸요.”

“그래서요?”

“‘네 살입니다’하고 대답하라고 가르쳐도 안 돼요.”

“엄마가 대신 잘해주는데 저 아이가 대답을 왜 해야 돼죠?”

“나라도 대답을 해야죠. 사람들이 아이를 바보로 알 것 아녜요. 그럼 점점 기가 죽어 더 말을 못할 거 아녜요.”

 

이 점이다. 기를 살리기 위해 엄마가 대신해준다. '대답도 못해!’하고 윽박지르는 엄마에 비한다면 한결 낫다. 욕심 같아선 누가 물으면 ‘예’하고 일어서서 큰 소리로 대답을 했으면 좋겠지. 대개의 엄마들은 아이가 그러길 바란다. 그렇게 키우려고, 그렇게 고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쉽던가. 안 되니까 답답하다. 대답이 안 나오면 기다리지 못하는 엄마가 대신한다.

그러나 명심하라. 아이의 표현은 어른과는 다르다. 눈으로, 몸짓으로, 자기 방식대로 한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엄마가 기다려줘야 한다는 점이다. 속이 답답하다고 대신해주면 아이는 정말 기가 죽는다. 자기 방식의 표현이 거부된다면 아이는 그나마도 하지 않게 된다.

 

엄마는 아이의 개성부터 알아야 한다. 아이의 개성은 좋든 싫든 아이의 것이다. 엄마 마음에 안 든다고 바꾸려 해선 안 된다. 이건 횡포다. 억지로 고치려는 건 폭력이다. 그리고 그 상처는 아이에게 오래도록 깊이 남는다.

엄마에겐 그럴 권리가 없다. 그리고 개성은 상당 부분 타고난 것이다. 해서 이건 쉽게 바꿔지는 게 아니다. 만약 아이가 철이 들어 그런 자기가 싫고 불편하다면 그때 고치려고 노력할 것이다.

물론 그건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다. 어쩌면 그건 일생에 거쳐 해야 할 과업일런지 모른다. 혹은 어른이 된 후 내성적인 자기 개성에 매력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런 대로 자기 개성에 맞게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게 될 것이다.

 

어느 쪽이든 엄마가 싫다고 고치려 해선 안 된다. 조급증은 더욱 금물이다. 개성은 아이 것이요, 아이의 특권이다. 엄마의 가치판단에 따라 싫고 좋고 나쁘고 할 시비의 대상이 처음부터 아니다. 이 점을 세상의 엄마들은 분명히 해주시기 바란다. 싫고 좋고는 아이 몫이다. 그 판단은 아이가 하는 것이다. 누구도, 물론 부모도 이 특권을 침해해선 안 된다.

 

참고 : 엄마, 그렇게 키워선 안됩니다

 

이시형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정신의학신문 고문
경북대학교 의학 학사
예일대학교 대학원 신경정신과학 박사
세로토닌 문화 원장, 힐리언스 선마을 촌장, 한국자연의학종합연구원 원장
정신의학신문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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