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온안 정신건강의학과의원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진 픽사베이

물리학자였던 에른스트 마흐(Ernst Mach)는 우리의 운동 상태가 오직 다른 어떤 존재의 운동 상태에 의해서만 결정된다고 주장하였다. 우리가 정지하고 있는지, 움직이고 있는지, 가속 운동을 하는지 등속 운동을 하는지, 어떤 속도와 방향으로 운동하고 있는지 등은 모두 다른 존재의 운동 상태와 비교하여 상대적으로만 결정된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이에 대한 입장에서 다소 완고했던 마흐는 심지어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우주에서 가속운동을 하게 될 경우엔 그것이 가속운동이 될 수 없고, 따라서 어떠한 힘도 느끼지 못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몇 광년이 떨어져 있건 그 우주에 다른 어떤 별이 단 하나라도 존재할 경우, 운동하는 물체는 스스로의 가속운동에 대한 관성력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심지어 그 우주에 존재하는 다른 별들이 많아질수록 가속운동에 대한 관성력을 더욱 정확하고 강하게 느끼게 될 것이라고도 이야기했다.

물론 마흐의 주장이 현재 물리학계에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각자의 존재가 서로 다른 이들의 존재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는 그의 이야기는 여러 가지를 곰곰히 생각케 한다. 단순히 물리학의 이야기를 넘어, 우리 각자의 존재에 대한 것들을 떠올리게 해준다.

 

“아 맞아요. 기억나요. 그건 바로 우리였잖아요. 그건 바로 우리 이야기에요”

영화 노트북에서 치매에 걸린 앨리는 그녀의 남편 노아가 읽어주는 그들의 사랑 이야기를 전혀 모르는 이야기인 듯, 처음 듣는 이야기인 듯 천진난만하게 듣는다. 그러다 문득, 물결처럼 다시 사라질 옛 기억이 떠올라, 그 이야기가 다름 아닌 자신의 기억이었음을 깨닫기도 하지만 다시 그녀는 노아를 잊어버리고 만다. 뜨거운 사랑과 눈물과 환희로 가득 찼던 앨리의 인생은 그 누구도 아닌 앨리 자신에게서 지워져 버린다. 앨리의 삶은, 그녀의 벅찬 사랑은 치매와 함께 흩어진다. 그녀의 사랑은 그녀의 남편 노아의 존재에만 기대어 별빛처럼 깜박이게 된다.

 

치매는 점진적인 인지기능의 감퇴를 동반하는 퇴행성 질환이다. 대부분 치매와 알츠하이머 병(Alzheimer’ s disease)을 동의어로 사용하지만 치매라는 퇴행성 뇌 질환은 알츠하이머 뿐 아니라 여러 형태의 아형을 포함한다. 그러나 그들의 공통된 병리적 특징은 질환의 진행에 따라 점진적인 뇌의 위축과 뇌 기능의 저하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특히, 치매는 뇌의 기능 중 고위피질기능(High cortical function), 인지-처리기능(executive function)의 저하를 주된 특징으로 보인다. 물론 운동기능이나 다른 기타 영역에 있어서의 문제를 보이기도 하지만, 주로 기억력의 저하와 과거의 기억에 대한 소실, 계산-처리 능력의 저하, 감각 수용기능의 저하, 성격의 변화를 포함한 뇌 전반에 걸친 기능의 저하를 가져온다. 치매는 조금씩 조금씩 환자의 의식을 그 사람의 인생으로부터 분리시킨다. 그가 살아온 기억, 감정, 생활양식, 행동 특성, 성격들로부터 그의 존재를 떨어뜨리고 와해시킨다. 치매는 무엇보다 우리를 우리가 아닌 다른 누구로 바꾸어 놓는 다는 점에 있어 다른 어떤 질병보다 무서운 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어떤 질병보다 슬픈 시련이고 말이다.

 

임상에서 만나는 치매 환자들은 치매 자체의 다양한 아형들만큼이나 각기각색의 다양한 질병 경과나 양상을 보여준다. 건망증이 좀 심해졌다는 환자, 계산하기가 힘들어졌다는 환자들로 시작해, 자식과 남편마저 알아보지 못하는 환자에서 말기에 이르러 대소변을 가리거나 거동하기조차 힘든 환자들까지 치매의 모습은 무척이나 넓은 스펙트럼을 포괄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환자와 의료진을 힘들게 하는 점은 중증도 이상의 심각한 치매환자에게 있어 질병의 진행을 막을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인지기능 개선제나 기분 조절제, 충동, 행동 조절 등을 위한 약물 등을 사용해보긴 하지만 치매는 시간과 함께 성큼성큼 뇌를 잠식한다. 그렇게 환자들이 스스로의 인생을 스스로의 머릿속에서 하나하나 지워가는 과정을 바라보고 있게 되는 경우가 많다. 환자들은 그렇게 자신도 모르게, 하나씩 하나씩 눈물겹게 아쉬운 자신의 발자국들이 지워지는 것을 망연히 응시하게 된다.

 

안타깝게도 이미 진행된 치매에 있어서는 사라진 과거의 기억이나 와해된 인지기능을 재건하는 것이 어렵지만, 초기의 치매나 경도의 인지기능 저하를 보이는 환자들에게는 병의 경과를 늦추거나 예방할 수 있는 치료적 개입이 상당히 여러가지로 제시되고 있다. 특히나 아밀로이드 PET-CT와 같은 도구를 통한 알츠하이머병의 조기 진단이 가능해진 최근에는 인지기능 저하를 막을 수 있는 치료의 제시가 점차 다각화 되고 있으며, 그 중요성 또한 부각되고 있다.

그 중,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은 치매에 의한 자서전적 기억(autobiographical memory - 자신에 대한 기억)의 감퇴를 예방할 수 있는 치료도 여러 가지로 시도되고 있다. 그 중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는 과거 Robert Butler에 의해 처음으로 제시되었던 ‘회상 요법’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르네상스 요법(reminiscence therapy)으로도 불리는 이 치료는 말 그대로 환자에게 자신의 과거를 회상을 통해 중흥, 부활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는 치료이다. 환자들은 이 치료를 통해 자신이 살아온 과거의 일생을 자서전을 쓰듯 시기별로 나누어 기록해보고 회상해보게 된다. 비교적 단순해 보이는 인지치료이지만, 이 회상요법을 초중기의 알츠하이머 환자들에게 적용한 한 연구에서는, 단순한 집단기억만을 대상으로 하는 인지치료를 시행한 환자군에 비해 회상요법이 자서전적 기억 손실 예방에 분명히 우월한 효과를 보임을 증명하기도 한 바 있다.(Lalanne et al. 2015)

회상요법을 통한 기억 재활 훈련을 시행하는 동안 환자들은 청소년기, 청년기, 장년기, 지난 5년, 지난 12개월 등으로 구분된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그 과정에서 치료자가 환자들에게 각인시키는 것이, 각 시기마다의 특정 사건이라기보다는 각 시기에 생각나는 다른 사람들, 특정 장소들에 대한 기억이라는 것이다. 환자들은 그 때를 기억하게 하는 당시 가족 구성원의 이름, 친구, 선생님, 동료 등의 이름을 기억해내고 적어볼 수 있도록 훈련한다. 당시의 연인, 당시의 주소, 학교 이름, 직장 이름 등을 되짚어 가며 각자 살아온 삶을 하나씩 다시 쌓아간다. 그렇게 환자들은 조금씩 자신의 자아를 되찾아간다. 그렇게 스스로의 존재를 이루는 자아라는 블록의 열쇠들이 다름 아닌 타자의 존재들, 그들과 함께 해온 다른 모든 이들의 존재에서 비롯함을 발견해 낸다.

 

우리는 인생의 굴곡에서 만났던 다른 이들과의 부대낌으로 얽혀진 시간들을 등에 업고 살아간다. ‘자아’라는 인생의 나무를 마음속에 한 그루씩 품고, 그 나무가 수없이 뻗은 가지들이 옆 나무, 옆 풀숲, 옆 뿌리들과 뗄 수 없이 얽힌 모습을 통해 스스로를 바라본다. 그러나 그 나무가 시들어 갈 때쯤이 되어서야 우리는 깨닫게 된다. ‘나’라고 믿어왔던, 나의 ‘자아’라고 믿어왔던 그 거대한 나무가 사실은 수많은 ‘너’로 이루어진 거대한 나무토막 더미였음을 깨닫게 된다. 나를 이루는 ‘너’의 시선에서 치매마저 딛고 일어설 ‘나’의 모습이 중흥한다.

마흐가 물리학적 본질을 들어 역설하였듯 우리는 모두 상대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모두가 서로에게 존재를 빚지고 있다. 굳이 치매 환자가 되어서 뿐이 아니다. 미움과 사랑으로 얼룩덜룩 묻어난 서로를 향한 시선에서 발견할 나의 모습을 되짚어 볼 때이다. 지금 내 곁에 있는 그 사람에게서 말이다.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온안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전공의
한양대학교병원 외래교수
저서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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