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성 인격

사진 픽사베이

1987년 마이클 더글라스, 글렌 클로스가 주연했던 영화 ‘위험한 정사(Fatal Attraction)’가 미니 시리즈로 제작된다고 한다. ‘위험한 정사’는 그해 미국 흥행 2위, 전세계 흥행 1위를 했고, 에로틱 스릴러라는 장르의 아이콘적인 작품으로 남은 영화이다. 책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편’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나를 알게 되면 모든 사람이 나를 떠나요’

가련함과 애잔함을 불러일으키는 이런 매력적인 표현엔 감히 감당하지 못할 섬뜩한 사랑이 담겨있다.

 

‘위험한 정사’는 성공한 변호사 댄이 어느 날 파티에서 우연히 만난 여성, 알렉산드라의 요염한 매력에 이끌려 하룻밤 정사에 빠져들면서 시작된다. 알렉산드라는 댄이 유부남인 걸 알면서도 그와의 무절제한 정사에 쉽게 동의한다. 그 후 그녀는 댄이 자신과 거리를 두려는 것을 느끼자, 필사적으로 그를 되돌아오게 조르는 시도를 한다. 댄이 어떻게든 알렉산드라를 떼어 놓으려 하면 할수록, 그녀는 더욱 더 매달린다. 반 위협, 반 애원조로 집요하게 매달린다. 마침내 그녀는 댄의 가정에 침입하여 댄의 아내와 싸움을 벌이고, 댄의 아이를 납치하기까지 한다.

 

“모든 사람의 사랑이 단순한 희로애락의 감정으로 규정지어질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사랑이 단순히 사랑할 때의 기쁨이나 헤어질 때의 슬픔으로 나뉠까? 나는 모든 사랑이 선택의 기로에 서 있을 때의 아주 섬세한 공포를 표현하고 싶은 것이다.” 이 영화의 감독은 평소 이를 자주 어필했는데, ‘위험한 정사’에서 알렉산드라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잘 표현하였다. 알렉산드라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을 때의 공포를 가장 강렬히 느끼는 사람이다. 알렉산드라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을 때 상대로 하여금 공포를 가장 강렬하게 일으키는 사람이기도 하다.

 

글렌 클로스는 이 영화에서 전형적인 경계성 인격(알렉산드라 역)을 연기한다.

‘나를 알게 되면 모든 사람이 나를 떠나요’라는 표현은 경계성 인격을 가진 사람들이 항상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문장이다. ‘진정한 나를 알게 되면, 모든 사람이 나를 떠날 것만 같다’ 경계성 인격을 가진 사람들은 항상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이런 믿음을 가지고 대인관계를 유지하며, 이것을 상대를 통해 끊임없이 확인하려 하고, 결국에는 그러한 믿음대로 결과가 나타나게 한다. 이들은 중요한 사람과 헤어짐의 순간이 다가왔다고 판단되면, 버려지는 것에 대한 공포감을 느낀다. 이런 공포감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상대방을 공격하거나 아이러니하게도 스스로를 공격하는 행동을 보인다.

 

상대방은 이러한 순간이 오기 전까지 변화무쌍한 그들의 모습을 모르고 지내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매력적인 사람 혹은 보살펴 줘야할 사람이라고 느끼며, 평소의 친밀함 이상으로 급격히 가까워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태도가 변하는 것을 경험하게 되면 그들의 정도를 넘어서는 행위와 생각에 이상한 느낌을 받고 ‘다시는 안 봐야지’라는 생각과 동시에 ‘내 잘못인 거 같아. 앞으로 잘해줘야지’라는 반성을 하게 된다. 이러한 양가감정은 그들과의 관계가 지속되는 한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힌다.

 

경계성 인격을 가진 사람들은 평소에도 극단적인 기분 변화를 보이기도 한다. ‘중간이 없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주변인들은 그들의 갑작스런 기분 변화에 당황스럽다. 분명히 방금 웃으면서 얘기를 했는데 갑자기 대성통곡하며 울거나 소리 지르고 욕을 한다. 중간이 없는 것은 기분뿐만이 아니다. 사람을 판단하는 데 있어서도 정말 좋은 사람, 아주 나쁜 사람, 양 극단의 두 가지의 사람만 존재한다. 스스로의 느낌과 감정에 맞춰 기준을 정하고 이러한 사람들은 좋은 사람 집단, 그러지 못한 사람들은 나쁜 사람 집단으로 나눈다. 또한 위에서 말했듯 한때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던 대상이 갑자기, 아무 일도 없이, 그 자신만의 느낌과 감정에 의해 나쁜 사람으로 변하기도 한다.

 

경계성 인격을 가진 사람들은 불안정하다. 이는 어린 시절 안정감을 획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이의 행동에 대한 부모의 태도가 일관되지 못하면, 아이들은 이러한 안정감을 획득하기 어렵다고 알려져 있다. 이런 아이들은 자신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부모의 존재가 너무 혼란스럽다. 시시때때로 변화를 보이는 부모의 태도에 신경 쓰느라 정신이 없다. 부모가 잘해주면 좋은 부모이고, 못해주면 나쁜 부모라고 판단하는데 이런 판단을 내리기조차 혼란스럽다. 성인이 된 후 상대에 대한 평가가 양 극단을 오가는 것도 이 때문이다. 부모에 대한 태도는 성인이 된 후 타인에 대한 태도로 작용하게 되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에는 부모와의 관계를 통해 자기를 평가하는데 이런 부모와 안정된 관계를 맺기란 무척 힘이 든다. 결국 스스로에 대해서 안정된 존재감을 갖지 못하게 된다.

 

다음은 경계성 인격장애의 진단 기준이다. 나 자신은 이런 경계성 인격을 가지고 있지 않은지, 자신과 상대를 괴롭히는 사랑을 하고 있지 않은지 한번 체크해보자.

 

• 경계성 인격장애의 진단 기준

대인관계, 자아상 및 정동에서의 불안정성, 심한 충동성이 광범위하게 나타나며, 이러한 특징적 양상은 성인기 초기에 시작하여 여러 가지 상황에서 일어난다. 다음 중 5가지(또는 그 이상) 항목을 충족시킨다.

 

1. 실제적이나 가장적인 유기를 피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

2. 극적인 이상화와 평가 절하가 반복되는, 불안정하고 강렬한 대인관계 양식

3. 정체감 혼란 : 심각하고 지속적인, 불안전한 자아상 또는 자아 지각

4. 자신에게 손상을 줄 수 있는 충동성이 적어도 2가지 영역에서 나타난다.

(예 : 낭비, 성 관계, 물질 남용, 무모한 운전, 폭식)

5. 반복적인 자살 행동, 자살 시늉, 자살 위협, 자해 행위

6. 현저한 기분의 변화에 따른 정동의 불안정성

(예 : 간헐적인 심한 불쾌감, 과민성, 불안 등이 수시간 정도 지속되지만 수일은 넘지 않음)

7. 만성적인 공허감

8. 부적절하고 심한 분노 또는 분노를 조절하기 어려움

(예 : 자주 울화통을 터뜨림, 항상 화를 내고 있음, 자주 몸싸움을 함)

9. 일과성으로, 스트레스에 의한 망상적 사고 또는 심한 해리 증상

 

 

조장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민트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전공의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저서 <나를 지키는 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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