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표현불능증(alexithymia): 정서적 변비를 끝내고 황금 쾌변 볼 때까지

[정신의학신문 : 신예니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그림_haerin

◆ 진료실 풍경

“과장님예, 내 쫌 잠깐 보이시더!”
(‘무슨 일 있었나... 어찌 표정이 좀 안 좋네.’)

“있지예……. 밤에 누가 내 자리에 와가, 똥-꾸멍을 고장 내뿌가 똥이 안 나와예! 난 인자 밥도 안 묵고 약도 안 물끼라예!”
(‘에잇! 대체 누가 밤새 똥꼬를 고장내논 거얏! 이 녀석을 당장!’)

웹툰이라면 이즈음에서 등장할 만한 (주먹 불끈 쥔) 그림말이 떠올라 잠시 생각에 빠져 본다.

 

정신과 약물 복용 후 변비 발생은 30%~50%, 정신과 입원 환자의 경우 100인년(人年, person year) 당 15의 발생률로, 변비로 인한 투약 거부가 드물지 않게 보고된다. 변비는 대개 약물이 체내에서 어떤 식으로든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는 증거이자 역효과로 이해된다. 그러나 특정 질환군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변비라는 현 증상은 밤새 (24시간 의료진이 함께 있는 이 보호 병동에 어떻게 들어왔을지 추호의 의심도 없이) 누군가가 (세상모르고 자고 있던 자신의) ‘똥꼬’를 (자신도 모르는 사이 무슨 수로든) ‘고장’ 내놓았다는 식의 논조로 불타오른다. 변비야 약물을 조절하면 해결되겠지만 뜨거운 망상에서 그녀를 구출해 내기란 또 다른 일이다. 차라리 ‘똥꼬’를 고장 낸 누군가를 찾아내 흠씬 두들겨 패주는 편이 더 쉽겠다 싶은 무능한 생각이 한껏 밀려든다.

그래도 이렇게나마 토로하는 환자가 장하고 고맙기는 하다. 변(便)이야 경구로 투약하든, 관장을 하든, 오늘 밤에라도 당장 바깥바람 쐬도록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정서적 변비(emotional constipation이라 해두자)’ 상태는 어찌할 것인가.

 

사진_픽셀

 

◆ 감정표현불능증

감정이 언어로 배출되지 않는 ‘정서적 변비’ 상태를 가장 잘 나타내는 정신과 용어 중 하나는 감정표현불능증일 것이다. 1970년대 초 미국의 정신과 의사 피터 시프니오스(Peter E. Sifneos)와 존 네미아(John C. Nemiah)는 고전적 정신신체장애 환자들을 연구하면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공통적인 특징을 발견했다: 1. 감정을 잘 알아차리지 못하고, 신체 감각으로 나타나는 정서 각성과 감정을 구별하기 어려워한다; 2.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감정을 설명하기가 어렵다; 3. 공상이 빈약해 상상 능력이 제한적이고 경직되어 있다; 4. 자극-구속적이어서 내적인 경험보다는 외적 사건과 자극에 초점 맞추기를 선호한다.

시프니오스는 이것을 감정표현불능증(alexithymia)이라고 하였다. 이는 그리스어로 ‘아니다, 없다(not)’를 의미하는 ἀ-(a-)와 ‘말(words)’을 의미하는 λέξις(léxis), 그리고 ‘마음, 감정, 혹은 말의 자리(heart, emotions, or seat of speech)’를 일컫는 θῡμός(thȳmós)의 합성어로 “감정을 나타낼 말이 없음(no words for emotions)” 내지는 “영혼을 표현할 말이 없음(soul without words)”을 뜻한다. 곧, 스스로 감정을(그러다 보니 타인의 감정도) 알아차리고 표현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감정표현불능증은 독립적인 정신과 질환이기보다는 정신신체장애, 우울증, 강박증, 중독, 식이 장애 등의 다양한 정신과 질환과 공존하며, 일반인에게서도 관찰되는 성격 특성이다. 「토론토 감정표현불능증 척도(Toronto Alexithymia Scale, 이하 TAS)」는 주관적 신체 증상에 대한 인식과 우울증에 관한 20개 항목으로 이루어진 설문지이다. 미해결된 감정 문제나 정서 상태가 다양한 신체 증상으로 나타나는 것은 말이 하지 못하는 것을 몸이 대신 말해주는 격이다.

 

◆ 도대체 왜?! 어째서?!

감정표현불능증은 감정을 처리하는 과정에 이상이 생겨 언어와 사고 인지 양식, 정서 조절에 결함이 생기는 것이다. 위험 부담을 피해 미성숙하고 부적응적인 인지적 정서조절방략을 사용하다 보니, 반추하고, 스스로나 남을 비난하며, 병에 관한 걱정이 지나치고 그 증상을 위협적인 것으로 여겨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는 파국적인 사고로 치닫는다. 이 과도한 스트레스가 체내에 각종 부정적인 물질과 호르몬을 분비시켜 두통, 불면, 소화기 및 순환기 장애 같은 신체 증상을 낳는다.

기질적 원인이 없는 증상들이 『정신질환의 진단 및 통계 편람(제5판, DSM-5)』에 와서는 신체증상장애(Somatic Symptom Disorder)로 분류된다. 신체 증상이나 건강문제와 관련된 지나친 생각, 느낌, 행동이 아래의 세 가지 중 하나 이상의 형태로 나타나며, 이 증상으로 고통스럽고 일상생활 기능에까지 문제를 나타낸다: 1. 증상의 심각성과 관련된 생각을 지나치게 지속함; 2. 건강이나 증상에 대해서 높은 수준의 불안이 지속; 3. 이러한 증상과 건강염려에 과도한 시간과 에너지를 쏟음. 신체 증상이 지속적이지는 않더라도, 증상 상태에 대한 걱정과 염려가 6개월 이상 지속될 때, 신체증상장애로 진단한다.

감정표현불능증은 감정을 조절하는 우측 뇌반구 이상이나, 좌우 뇌반구 간의 연결과 교류에 이상이 있는 경우, 즉 우측 뇌반구에서 감정 관련 정보를 보내더라도 좌측 뇌반구의 언어 처리 영역에 제대로 전달되지 못할 때 나타난다. 달리 말하자면 감정표현불능증은 자기 이해와 통합에 이르지 못한 상태이다. 기능성자기공명영상(fMRI) 연구에 따르면, TAS 평가에서 감정표현불능 성향이 높았던 사람들은 감정 처리 과정에서 전대상피질(anterior cingulate cortex)의 활성이 대개 감소했다. 전대상피질은 뇌의 상부에서 내려오는 정보와 하부에서 올라오는 정보를 처리하기에 좋은 위치에서 다양한 감정과 인지 처리를 복합적으로 담당하는데, 감정표현불능증의 경우 양측 두뇌 반구 간의 연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인지, 심상, 감정 처리의 조절과 통합이 어려웠다. 오히려 심장박동과 호흡 같은 몸의 감각 신호를 뇌의 여러 부위에 전달·연결하는 인슐라(insula)의 활성이 증가한다. 각종 신체 증상에 지나치게 각성될 뿐, 정서적인 해석이나 언어적 표현에는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인정 혹은 인식하거나 표현하지 못하다 보니 대개 타인의 감정에까지 이르기가 어려워, 결국 대인관계는 피상적이거나 경직되는 불편함의 연속이다. 실제 증상과 관련된 신체 질환이 있는지 체계적이며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고 적절한 치료가 뒤따라야 한다. 그러나 기질적인 원인 없이, 표현되지 못한 감정과 생각이 증상으로 ‘병’을 만드는 경우, 이름하여 기능적 질환의 경우에는 다양한 훈련을 시도해볼 수 있다. 

 

◆ “5-3=2” & “2+2=4”

이것은 출처를 밝히기 어렵지만, 오해와 이해와 사랑에 관한 공식이다: “어떤 오[5]해라도 세[3] 번 생각해보면 이[2]해 할 수 있다.” 그리고 “이[2]해와 이[2]해가 모이면 사[4]랑이 된다.”라는 의미라고 한다. 감정표현불능자나 그 지인들이 서로 오해를 넘어 이해와 사랑에 이를 수 있도록 맥락을 제시하고자 한다.

감정표현불능자는 다양한 시각에서 해석될 수 있다. 발생학적인 과정이나 유아기 발달과정에서 감정에 관여하는 뇌 영역과 감정, 상상에 관여하는 뇌 영역 간의 연결과 교류가 부족한 경우는 상술한 바와 같다. 행동주의적 입장에서는 평소 다양한 이유와 상황으로 감정 표현이 어렵고 그나마 신체 증상이 편한데, 증상을 호소하다 보니 의외로 주위의 관심과 면죄부를 얻고, 그러한 외부 환경에 의해 증상이 점차 지속·강화되는 결과를 낳는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건강하다면 이상한 증상이 하나도 없어야지”라는 식의 경직된 사고나, “심장이 왜 이러지? 이건 필시 부정맥일 거야!”처럼 어떤 신체 증상의 원인이 무조건 심각한 병 때문이리라는 잘못된 인식과 해석이 신체 증상에 몰두하게 하고, 그러다 보면 증상이 더욱 강화되고 확대된다는 인지주의적 입장의 해석도 있다. 실제로도 신체 질환이 없는 것이 확실하다면 (신체 질환이 있다면 그것을 치료하는 것이 우선임) 이러한 증상은 심리적인 요인들로도 야기될 수 있음을 인정·수용하는 사고의 전환이 도움이 된다. 

사회문화적인 해석도 가능하다. 감정을 다루기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 다양한 감정 구분이나, 상징화를 사용하는 의사소통 방법과 기술을 발달시키지 못한 경우, 정서적인 교감에 대한 학습과 경험이 부족한 탓으로 보기도 한다. 부모가 아이의 울음에 시기 적절히 반응하여 “화가 많이 났구나”, “배고팠구나”, “슬펐구나”, “놀랐구나” 등의 다양한 감정을 인식시켜줄 여유가 없었다거나, 충격적인 사건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너무나 강렬한 감정을 체험한 때도 마찬가지이다. 감정을 제대로 겪을 수 없는 환경이라든지, 직접적인 감정 표현을 꺼리고 지양해야 할 덕목으로 여기는 문화, 이것을 어른스럽지 못하다고 치부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는 경우에도 감정표현불능증이 사례가 보고된다.

 

사진_픽셀

 

◆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1. 낙담은 금물! 신경가소성 활용하기

정신과 질환에 동반된 감정표현불능증을 겪는 환우이든, 감정 표현이 어려워 ‘정서적 변비’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이든, 혹은 그런 사람을 가까이 둔 누구든 ‘난 틀렸어!’라며 낙담하기는 이르다. 어린 아이나 성인, 그리고 노인에게 공히 우리는 신경가소성을 가진 뇌를 하나씩 가진 사람들이다. 우리의 뇌에 우주보다 큰 공간, 별보다 많은 연결이 있다는 이야기를 기억하는가(『진료실 컬러 박스 7. 책과 뇌의 앙상블: 우주 라떼를 담고 닮은 두뇌』 참조). 우리 각자는 지금부터의 사고 전환과 새로운 경험들로 평생에 걸쳐 있던 수많은 결핍과 상처를 보완하고 채우고 새롭게 이루어갈 가능성을 지닌 존재들이다. 

2. 감정 익히기: 감정 이름짓기

감정을 느끼기도 표현하기도 어렵다면 우선 다양한 감정을 배우고 익힐 필요가 있다. 어릴 적 경험하고 학습하지 못했던 감정을 신체 증상으로 치부하지 말고 이제부터라도 감정에 이름짓기를 시작해보는 것이다. ‘얼굴이 화끈거리네. 병인가?’가 아니라 ‘내가 부끄러워하나? 긴장했나? 불안한가? 뭔가 불편한가? 어떤 불편한 감정이지?’와 같이 자신의 느낌과 감정을 탐색해본다. 마음챙김(mindfulness) 이론에서는 그 감정을 매 순간 알아차리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것을 추천한다. 이것을 어찌하려고 하지 않고 그대로 느끼고 경험해보는 것이다. 그때 내 감정과 느낌과 몸의 상태를 알아차리는 것, 거기서부터 출발한다. 

3. 부정적 감정에는 ‘플러싱 연습’을

한 걸음 더 나아가 감정을 일종의 현상으로 여길 수도 있다. ‘화가 난다’처럼 화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기보다 ‘화나는 감정을 갖고 있다’라는 식으로, 나와 감정 사이에 거리를 두어 부정적인 감정을 놓거나 떠나보낼 수 있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감정에 대한 비판단적 관찰이 유용하다. 한 걸음 떨어져 그 감정을 관찰하고 떠나보내는 것이다. 『진료실 컬러 박스 2. 푸르죽죽 산후우울감 vs. 행복의 파랑새』에서 제안했던 ‘플러싱 연습(flushing exercises)’이 도움이 될 것이다. 

4. 단절된 관계의 재연결, 그리고 새로운 정서 경험

손원평의 소설 『아몬드』는 감정표현불능증을 가진 16세 소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주인공은 대뇌변연계에서 감정조절과 공포에 대한 학습 및 기억을 담당하는 ‘아몬드’ 모양의 편도체가 작아 분노도 공포도 잘 느끼지 못하는 아이로 설정되어 있다. 그가 정서적인 대인관계와 다양한 경험을 통해 타인과 그들의 감정을 이해하는 여정을 그린 이 소설은 “한국형 영-어덜트 소설의 등장”으로 평가된다. 스스로 그리고 타인과 단절된(dis-connected) 관계를 재연결(re-connect)하고 새롭게 혹은 교정된 정서 경험을 하는 것, 그래서 그 연결과 경험이 풍성해진다면,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런 감정을 신체 증상이 아닌 언어로 표현해낼 수 있는 안전한 심리적, 물리적 공간이 마련된다면 좀 더 수월하고 투명한 말로 감정을 담아낼 수 있지 않을까.

 

◆ 배변의 기쁨

이제 ‘정서적 변비’를 끝내고 건강한 황금변을 목표로 감정을 소화시켜 보자. ‘정서적 설사(이에 대해서는 다른 지면에서 다룰 것이다)’라 할 만한 화, 분노발작, 감정의 폭발과 같이 언제 터질지 모르게 과격하고 폭발적인 정서 반응, 혹은 배설하듯 공격적인 말을 쏟아내는 그런 무질서한 감정 상태 또한 극복하고 말[言]의 형태를 갖추어 배설해 보자. 내일은 당신이 ‘쾌변’의 기쁨으로 ‘밥도 묵고 약도 묵도록!’ 

 

* 참고자료

게이버 메이트 지음, 류경희 옮김, 정현채 감수. 『몸이 아니라고 말할 때(When the Body Says No)』 서울:김영사, 2015.

손원평, 『아몬드』 서울:창비, 2017.

조셉 시아로치, 조셉 포가스, 조셉 메이어 지음, 박재현, 장승민, 권성우 옮김. 『정서지능(Emotional Intelligence)』 서울:시그마프레스, 2005.

Faramarzi M, Azadfallah P. et al. “A randomized controlled trial of brief psychoanalytic psychotherapy in patients with functional dyspepsia”. Asian Journal of Psychiatry 6, 2013:228-234.

Jessurun JG, van Harten PN, Egberts TCG, Pijl BJ, Wilting I, Tenback DE. “The effect of psychotropic medications on the occurrence of constipation in hospitalized psychiatric patients”. Journal of Clinical Psychopharmacology 33(4), 2013:587–590.

Moriguchi Y. et al. “The human mirror neuron system in a population with deficient self-awareness: an fMRI study in alexithymia”. Human Brain Mapping 30, 2009:2063-76.

Wiebking C, Northoff G. “Neural activity during interoceptive awareness and its associatios with alexithymia- An fMRI study in major depressive disorder and non-psychiatric controls”. Frontiers in Psychology 6(589), 2015:1-18.

 

* 대한정신건강의학과 봉직의협회는 정신건강의학과 봉직의들로 구성된 비영리단체로, 일선 정신건강의학과 진료현장의 불합리한 제도를 개선하고 정신건강의학과 봉직의들의 권익과 처우를 증진시키며 이를 통해 환자의 치료받을 권리 보호와 정신 건강 향상을 목표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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