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픽사베이

 

‘나는 가슴팍에 no CPR 이라고 커다랗게 문신을 새겨놓겠어. 내가 죽을 위기에 놓였을 때 CPR을 하려고 윗옷을 벗긴 의사들은 그 문신을 보고 어쩔 줄 몰라 하겠지. 그 사이에 난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거야.’

병원에서 인턴을 하던 시절, 심폐소생술을 끝마치고 휴게실에서 잠시 쉬던 중 이었다. 동료 인턴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어차피 온전히 살아날 가능성이 없다면 차라리 편하게 죽고 말겠다면서 말이다. 실없는 농담이라며 웃어넘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농담은 내 머릿속에 더욱 자주 떠오르곤 했다. 우리에게는 그와 같은 상황이 생각보다 자주 찾아왔던 것이다. 회복될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환자들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포기할 수 없다는 이유로 수많은 치료가 행해졌고, 그 중 어떤 치료들은 환자의 고통만을 연장시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보호자와 연락이 닿지 않아 어쩌면 아무런 의미가 없을 심폐소생술을 지속해야 할 때나,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에 의지하며 살아가는 환자들의 초점 없는 눈빛을 바라볼 때, 이것은 이길 수 없는 싸움이고 우리는 의미 없는 싸움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문득 떠오를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애써 외면하며 아직 나의 지식이 부족한 탓이라 생각했고, 어쩌면 그러한 생각 자체가 일종의 직업 윤리를 어기는 것이라고 느꼈던 것 같다. 아무리 흉악한 범죄자라도 그들의 형량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변호사의 의무인 것처럼, 살아날 가능성이 없는 환자라도 어떻게든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의사의 책임 있는 모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나에게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새로운 관점의 새로운 생각들을 접하게 해주었다. 어쩌면 잊고 있던 기존의 기억을 상기 시켜주었다는 것이 더 적합할지도 모르겠다. 책 속의 많은 사례와 생각들은 분명 나도 경험하고 느꼈던 것들이니 말이다. 현직 외과의사이자 공중보건학자인 저자는 현대의학이 죽음에 맞서기 위해 시도하는 방법들이 얼마나 죽음의 과정을 왜곡시키고 도리어 환자에게 고통을 주고 있는지 지적한다. 지난 10여년간 죽음을 일종의 의학적 경험으로 만드는 실험이 이루어졌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책의 전반부에서 가장 크게 비판하는 것 중의 하나는 요양원이다. 저자는 요양원의 역사적 기원을 따라 올라가면서, 애초에 요양원은 노인들의 행복한 노후를 위해서 만들어지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의학의 발달로 환자들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면서 병실이 부족해지게 되었고, 이렇게 가득 찬 병실을 비우기 위한 목적으로 요양원이 설립되었다는 것이다. 처음 탄생 배경이 이러하니 노인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을 제공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현대의 요양원은 단순히 노인들의 안전과 건강관리의 효율성에만 관심을 가질 뿐, 그들이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친구, 사생활, 삶의 목표 등을 추구하지 못하도록 통제하는 요양원은 감옥이나 군대 훈련소와 같은 전체적 기관에 다름 아니게 되었다.

 

후반부에서는 불치의 병으로 죽음에 임박한 환자들에게 이루어지는 의학적 조치들의 한계를 지적한다. 심각한 질병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단순히 생명을 연장하는 것 말고도 해야 할 중요한 것들이 있다. 고통을 피하고, 주변사람들과 관계를 더 돈독히 하고, 정신적 능력을 잃지 않으며, 자신의 삶을 완결시키는 것 말이다. 하지만 현대의학은 오로지 생존기간을 늘리는 것에만 관심을 두면서 이러한 근원적 욕구를 충족시키는데 실패하였다. 저자는 대안으로 호스피스 케어의 활성화, 더 나아가 모든 치료의 호스피스화를 제안한다. 여기서 호스피스란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단순히 치료를 포기한 채 고통을 줄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의료행위의 목적을 생명 연장이 아닌 현재의 삶을 최대한 누릴 수 있도록 돕는 것으로 바꾸는, 일종의 가치관의 변화를 의미한다. 의사와 환자는 가장 중요한 목표는 무엇인지, 그걸 이뤄내기 위해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것과 그럴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세심히 고려하여 적적한 치료 방침을 결정하는 것이다.

 

저자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명쾌한 답안을 제시해주지는 않는다. 다만 자신이 보고 느꼈던 노년과 죽음의 모습을 담담하지만 깊이 있게 묘사함으로써, 죽음 앞에 조금 덜 오만해지고 조금 더 용기를 내보자고 말할 뿐이다. 어쩌면 이 책의 힘은 그러한 섬세함과 사려 깊은 태도에서 나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책을 끝까지 읽고나니 분명 어떤 면에서는 과학적 타당성이 의심스러웠고, 지나치게 공상적으로 보이기도 했으며,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책의 문장 속 곳곳이 스며들어있는 그 섬세함과 사려깊음만큼은 가슴에 남아서 나로 하여금 어떻게든 한번 더 생각하고 고민하게 만들었다. 결국 이런 문장,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삶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분명할 테니까. 그리고 이토록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 죽음에 대해 이야기 한다면, 우리는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을 테니까.

 

 

정희주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서울역 마음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건국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졸업
한양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전)성동구 정신건강복지센터 상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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