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픽사베이

시대와 장소를 넘나들며 사람들에게 막강한 영향을 끼치는 것들이 있습니다. 사랑이나 평화와 같은 추상적인 것에서부터 돈, 음식, 혁신적인 기계와 같은 구체적인 것까지 다양하죠. 안타깝게도 저는 밝지 않은 얘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바로 정신건강이죠. 요새처럼 혼란스러운 때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북으로는 북한, 남으로는 일본이 위협을 해온다는 얘기는 이제 질릴 만큼 들었습니다. 대한민국만 놓고 본다면 취업난, 학업경쟁, 전세대란 등등 삶을 옥죄는 얘기들이 연이어 들립니다. 그래서 그런지 젊은 사람들은 가정을 꾸리지 않고, 그나마 이뤄졌던 가족들은 각자의 생계를 위해 뿔뿔이 흩어지기도 합니다. 위협과 혼란 속에 개인만이 남습니다. 참 추상적인 의미로서의 개인인데요, 이 시대 개인들의 정신세계를 들여다보겠습니다.

 

한 사람이 심각한 위협을 당할 때-예를 들면, 잘 나가던 대기업 임원이 하루아침에 해고 당하거나, 10여년 가까이 취업에 매달리지만 성공하지 못하거나, 이혼을 당하거나, 사별을 하거나, 건강을 잃거나-보이는 특유의 그리고 대개 일반적인 정신적 작동원리가 있습니다. 바로 ‘상실’에 대한 정신적 반응입니다. 이 시대는 ‘상실’되어 버렸거나 그럴 위기에 놓여 있거나 곧 그렇게 될 예정인 것들을 끊임없이 좇으며 살아가야 하는 때인 것 같습니다. 돈, 직위, 명예, 건강 그리고 사랑마저도 그렇죠.

 

혹독한 현실에 대항하여 개인의 정신세계는 나름의 전략을 짜고 작동시킵니다. 개인이 상실의 위협을 당할 때 처음에 그의 정신세계는 마치 그것이 실제로 벌어지는 일이 아닌 것처럼 여기려고 합니다. 그것을 부정(denial)이라고 합니다. 이 개인은 곧 현실을 맞닥뜨려야 함을 깨닫고 분노(anger)하게 되죠. 그리고 막강한 어떤 존재나 운명을 염두에 두고 비현실적인 것까지를 포함하여 갖가지 타협(bargain)을 보고자 합니다. 예를 들어 “이번에 건강을 회복시켜주면 평생 선행하겠다.”와 같은 내용이죠. 하지만 이마저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고 우울(depression)해지게 됩니다. 결론만 놓고 보면, 상실로 위시되는 혹독한 현실이 우울이라는 짙고 어두운 그래서 너무 암담한 개인을 만들어버리는 거죠.

 

사실, 부정-분노-타협-우울로 이어지는 정신세계의 작동원리는 임종에 가까운 즉, 생명을 상실할 위기에 놓인 사람들이 공통으로 보이는 정신현상을 조사한 퀴블로로스라는 사람에 의해 알려졌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요즘 주변을 돌아보면, 시대 속에 매몰된 개인들이 마치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것 같다는 겁니다. 돈, 집, 직장 등등 많은 것들을 얻고자 하지만 가장 굳건하게 버티고 있는 미래는 ‘상실’이라니 안타깝죠.

 

퀴블로로스는 임종 직전의 사람들은 우울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다고 했습니다. 그건 수용(acceptance)인데요, 말 그대로 모든 걸 받아들인다는 겁니다. 여기서는 죽음을 의미하겠죠. 하지만 누군가 이 시대 개인들에게 혹독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한다면 안 되겠죠. 사실 수용이란 매우 성숙한 정신활동의 결과라서, 수용하란 말만 듣고 수용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개인의 정신건강은 상실의 시대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도 뭐하고 무작정 역행하기도 뭐한 애매한 틈에서 점점 더 나빠지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 적절한 지점을 각 개인이 알맞게 찾아낼 수 있게끔 도와주는 일이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로서의 임무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김일빈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강남차병원 교수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한양대학교 구리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임상 조교수
한양대학교 뇌유전체의학(자폐) 석사
KAIST 뇌유전체의학(자폐, 조현병)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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