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유은정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이 진료실에서 마주하는 가장 흔한 감정은 바로 분노와 우울일 것입니다. 분노와 우울은 서로 전혀 다른 감정인 것 같아도 동전의 양면과 같이 불편한 감정이 밖으로 향하면 분노, 그리고 내 안으로 향한다면 우울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분노는 자기중심성에서 출발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에게 있어서 이 상황은 너무나 불공평할 때 인간은 분노라는 감정에 자동적으로 휩싸이게 됩니다. 그렇다면, 분노는 무조건 나쁜 것일까요?

쉽게 화가 잘 나는 분이라면 분노가 일어나는 심리기전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일상에서 쉽게 일어나는 분노의 심리기전을 다음의 8가지로 설명해보았습니다.

 

1) 인간관계

인간관계는 나름대로 원칙이 있습니다. 때로는 조금은 이기적이어도 괜찮습니다. 누군가에게 늘 최선을 다했는데 계속 돌아오는 것이 상처라면 그 인연은 끌고 갈 필요가 없을 겁니다.

저는 늘 사람의 네트워크도 원칙을 만들라고 합니다. 스쳐가는 인연이 있고 오래 머무는 인연이 있습니다. 모든 관계에 내가 에너지를 투자하고 정성을 쏟는다면 기대만 점점 늘어가고 실망과 상처는 점점 커집니다. 그것이 인간관계에서 사소한 일에 상처 받지 않는 방법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내 마음을 이해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지금이 아니어도 떠날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정리를 해야 합니다. 돈은 벌면 되고, 건강은 챙기면 되지만 사람은 마음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나를 최우선으로 보호하면서 서로 상처를 받지 않을 이런 원칙들이 필요합니다.
 

사진_픽셀


2) 자기 보호본능

화가 나는 상황에서 화를 안 내기는 참 힘듭니다. 횡단보도 앞에 서 있는데 누가 와서 따귀를 때렸다고 해보면, 화가 나는 게 정상입니다. 인간은 보호본능이 있기 때문에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내 영역을 보호하기 위해서 화가 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교통체증은 짜증 날 정도입니다. 그중에서도 자기 영역을 침범당했다고 느껴 행하는 보복운전은 정말 무서운데 저도 당해봤습니다. 차선을 바꿨을 뿐인데 내 차 앞으로 끼어들며 빵빵거리며 계속 따라왔고 신변의 위협을 느낄 정도였습니다.

묻지 마 범죄, 위아래 상관없이 함부로 말하는 지하철 막말 같은 사건은 분노조절장애가 있는 겁니다. 마음이 단단하고 덜 예민하면 상처도 덜 받는데 주변의 누군가가 화를 잘 낸다면 ‘상처를 잘 받는 사람이구나’라고 불쌍히 여기고 지켜보아야 합니다. 

 

3) 자기중심적 사고

정신과 의사로서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이 화를 많이 내는 이유 중 하나는 자기 중심성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와 다른 것은 무조건 나쁘다고 하는 것입니다. 좌파와 우파, 보수와 진보, 남성 대 여성, 노인 대 젊은이, 너무 심하게 편을 가르다 보니 마음속에 있던 공격성을 상대방에게 투사합니다.

우리의 상황이 불안해서 그런 것입니다. 상대방에게 공을 던지듯 공격성을 띠고 눈덩이 부풀리듯 부풀려서 “너 죽어라” 하고 던질 대상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반대편 사람도 똑같이 나에게 화를 던지게 됩니다.

밖으로 향한 분노는 타인을 향한 육체적 언어적 폭력으로 나타나지만 나를 향한 분노는 무기력증과 우울증으로 표출됩니다. 사실 분노의 최고봉은 ‘자살’입니다. 우리나라가 자살률 1위를 13년째 유지하고 있고 분노조절장애가 많아진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우울증은 자신을 못 살게 굴며 스스로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것도 분노입니다. 자살 또한 실제로 시도하는 것뿐 아니라 내게 이로운 일을 하지 않고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하는 모든 것이 해당됩니다. 졸음운전, 일중독, 성형중독, 미디어나 게임중독 등 자기파괴적인 행동 역시 분노의 표현입니다.

 

4) 가치관이 다른 세대

화병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고유의 질병으로 미국의 정신과 질환 진단 책에 “Hwa Byoung”이라는 정식 진단명으로 등록이 되어 있는데요. 화병이 왜 생겼을까요?

저는 유교문화의 영향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한 살 차이만 나도 “감히 윗사람에게 어디서?”라고 말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며느리 문화입니다.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참는 것이 미덕이라고 합니다. 저는 강연에서 며느리들에게 말합니다.

“시어머니에게 대들고 싶거든 독립투사가 돼라.”

문화적으로 고립되어 보이지 않은 감옥에 갈 각오를 하지 않으면 쉽게 자기주장을 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쌓인 화를 얼굴은 보지 않고 말만 하는 전화를 통해 하고 싶은 말들을 쏟아내는 것은 상대방의 가슴에 유리파편을 박는 것과 같습니다. 말하는 이는 잘 모르고 말합니다. 분노를 표현할 때에는 차라리 만나서 상대방이 준비가 되어 있는지 보고 말해야 하고, 말할 준비와 연습을 충분히 하고 가야 합니다. 참고 억누르거나, 한꺼번에 폭발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다른 입장을 서로 이해해야 합니다.

“며느리 세대는 내 세대와는 다르구나.”

20년 전만 해도 스마트폰이 이처럼 활용되지 않았습니다. 보수와 진보, 남자와 여자도 나쁜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화병의 속 풀이 처방전은 화나게 하는 사람과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하는 것이 1번입니다.

“아, 나와 다른 사람이구나, 가정교육이 나와 달랐나 보다, 세대가 나와 차이가 많구나.”

성숙한 사람은 나와 다른 사람에게 귀 기울일 수 있습니다.

 

5) 화내는 것도 습관

습관적으로 화를 잘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좀 더 나아가서 반복적으로 분노를 폭발하고, 욕설과 폭언, 폭력적인 행동을 통해 상대방을 움츠리게 만들면 그것도 폭력입니다.

이런 뉴스가 보도됐던 적이 있습니다. 경비원과 지나가는 이웃 간의 싸움이었는데 경비원이 화단에 있던 풀을 뽑아서 화분을 털면서 흙이 튕겨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흙을 맞은 이웃이 고소했습니다. 이것은 폭력일까요, 아닐까요?

재판 결과 폭력으로 판명됐습니다. 왜냐하면 흙을 털다가 흙이 튕겨 상대방이 맞았기 때문입니다. 흙을 맞지 않아도 위협적인 행동은 폭력으로 간주됩니다.

또, 내가 해야 될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수동적인 폭력’입니다. 부부싸움 후 배우자에 대한 미운 감정 때문에 가정 생활에 협조를 하지 않는다거나 내가 분담한 일을 하지 않는 것도 큰 범위에서는 모두 폭력에 속한다는 것,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사진_픽사베이


6) 반복되는 분노폭발은 정신질환

화를 내는 것이 너무 반복적이라면 정신질환 중의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상처를 쉽게 받는다면 어린 시절에 상처의 뿌리가 있기 때문이며, 또한 화내는 사람의 대부분은 음주 후에 화내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화내는 정도가 남들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일 때 피해의식이나 낮은 자존감, 콤플렉스가 많은 사람들은 화가 부글부글 끓을 정도로 쉽게 납니다.

폭발 후 후회가 밀려든다면 우울증, 분노조절장애, 피해망상, 알코올중독 등 의심해보아야 합니다. 이 정도의 반응이 자주 나타난다면 뇌의 변화가 이미 일어나 있는 것이므로 약물치료와 전문가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내가 조절하지 못하는 분노를 알아차리고 치료를 위해 노력을 하는 것이 변화의 첫걸음입니다.

 

7) 착한 사람 콤플렉스

화병이 생기는 사람들에게는 특징이 있는데, 바로 ‘착한 사람 콤플렉스’입니다. 밖에서는 한없이 좋은 사람인데 가장 잘해주어야 할 가까운 가족에게는 함부로 대하는 사람입니다.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 보니 자기주장을 못하고 양보만 하게 되고, 계속 밖에서 퍼주다 보면 쉽게 지칩니다. 그러다 보니 화를 쉽게 내게 되고, 양보만 했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히면서 분노가 차곡차곡 저축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너무 착한 사람이 되려고 애쓰지 말라고 말해줍니다. 남에게 착하게 대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남에게 착하게 보이고자 하는 목적이 있을 때 하지 말라는 겁니다.

누군가에게 잘해주고 싶다면 먼저 물어보세요. 누구를 위해서 선행을 베푸는 것인가? 나를 위해서인가? 그 사람을 위해서인가?

상대를 위한 봉사의 의도가 아닌 나를 좋게 보이고 싶고 욕먹기 싫어서 무리하게 선행을 베풀다 보면, 내가 할 수 있는 분량은 요만큼인데 그 이상을 퍼주다 보니 부작용이 옵니다.

 

8) 낮은 자존감

특정 주제에 더 예민한 분들이 있습니다. 환자 중에는 남자의 따귀를 때려서 온 경우가 있었습니다. 여자 둘이 앉아있는데 옆 사람보다 자기 얼굴이 크다고 얘기해서였습니다.

남자들은 그런 얘기를 정말 쉽게 합니다. “살이 쪘네, 빠졌네, 화장이 잘 됐네, 안 됐네, 얼굴이 부었네, 안 부었네”라고 말입니다. 여자의 외모를 지적하는 것은 올바른 매너가 아닙니다. 외모 콤플렉스로 상처 받아 성형중독에 이르러 정신과 상담을 받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남이 뭐라 해도 영향을 안 받으면 상관없지만 자기의 콤플렉스를 말하면 정말 상처 받고 화를 내게 됩니다. 어떤 분에게는 쉽게 상처 받는 부분이 학력 콤플렉스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화를 잘 내는 사람을 보면 불쌍하게 여기고, 그 부분이 그에게 콤플렉스임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유은정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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