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중독포럼 김장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60대 남자분께서 난리법석을 피우며 병원 응급실로 들어오셨습니다. 끌려왔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 테고, 상기된 경찰관 두 분의 얼굴 뒤로는 지친 기색이 역력한 부인과 잔뜩 화가 난 딸의 표정이 따라옵니다.

양 팔을 잡고 있는 경찰관에게, 또 벽과 책상에 자꾸 머리를 부딪치시는 통에 강박을 시행하였습니다. 쏟아지는 육두문자 가운데는 ‘죽여버린다’가 반복되었지만, ‘죽어버린다’도 분명히 들려왔습니다.
 

사진_픽사베이


매일같이 음주를 하고, 취하면 부인에게 폭언을 하고 폭력을 행사해왔다고 합니다. 젊었을 때부터 많이 취하면 필름 끊기는 증상은 있었는데, 5년 전부터는 아주 부끄러울만한 행동을 하고도 기억해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부인과 다투다 보면 어김없이 손찌검을 했고 자살하겠다며 가족을 위협했습니다.

그날도 가전제품을 던지며 화를 내다 칼로 손목을 긋기에 이르자 딸이 경찰에 신고하여 병원에 오게 된 것이었습니다. 입원치료가 필요하다는 반복적인 설명에도 부인은 망설였고, 결정을 한 이후로도 멍한 상태로 앉아계셨습니다.

 

부인께서는 현재도 서울 한복판에서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유복한 가정에서 막내딸로 자랐고, 부모님께, 남편에게 순종하며 살아온 것 같았습니다.

남편의 치부는 절대 밖으로 드러내지 않도록 노력해 왔고, 수년 간 폭언과 폭력에 시달리면서도 자신이 잘못했다고 빌면서 무마하려고 했고 주변 사람들과 자녀들에게도 아무 문제없는 것처럼 지내려 하였습니다.

 

환자분과 제대로 된 면담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로부터 5일째였습니다. 부유하고 보수적인 가정에서 성장하였고 좋은 직장에 간부로 역할하다 퇴임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술을 많이 마시긴 했지만 그럴만한 여러 이유가 있었고 이전부터 대형병원에서 건강검진은 받고 있으니 저는 걱정 말고 며칠 쉬다 가겠다고 하셨습니다.

최근 이러한 문제를 더 이상 숨기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이웃들이 싸우는 소리를 다 듣게 되었고 환자분이 현관 밖으로 뛰쳐나가서는 집 앞 골목에서 전혀 통제되지 않는 모습까지 보였기 때문이지요. 부인은 남편의 음주 문제, 자신이 이러한 폭력의 피해자라는 것보다는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이 가장 큰 걱정이라고 불안해하였습니다. 가정이 유지되고 자녀들이 잘 지내고 있는 것이 자신이 이 모든 것을 막고 희생했기 때문이라는 신념을 갖고 계셨습니다.

더 이상 가정을 지킬 수(숨길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은 부인께는 인생이 무너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친정 식구들과 조상을 볼 면목이 없다는 이야기도 하셨고, 남편의 이혼 협박을 두려워하고 계셨습니다. 자녀들마저 우유부단한 어머니 태도를 나무라고 있었으니 사면초가라 느껴졌을 테지요.

무엇보다 남편을 강제로 입원시켰다는 것이 대한 죄책감이 큰 상태였습니다. 피할 수 없는 치료 과정이고 환자분께도 의료진들이 그 이유를 납득하실 수 있도록 면담한다고 알려드리는 것으로 충분치 않아 부인께 ‘집단 가족치료’ 참여를 권하였습니다.

 

여느 다른 심리적 어려움을 겪는 분께도 드리는 말씀이지만, 당신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은 큰 위로가 됩니다. 여러 알코올 중독자의 가족들을 만나며 부인께서 인생 최대의 위기라고 느꼈던 불안은 감소되었습니다. 이전까지는 숨기고 혼자 앓아오던 문제를 타인의 유사한 경험과 비교하며 객관적으로 남편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임에 정기적으로 참석하는 자신을 지지하는 자녀들로부터 이해받는다는 느낌을 받았고 이 모든 것이 더 긴 과정의 초입이라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생기를 회복하며 불안은 사라져 갔습니다. 비슷한 문제로 고민하는 젊은 부인에게 강력한 지지자로 도움을 주었고 시간이 지나고는 어느새 그룹치료의 큰언니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에는 그룹 멤버들 모두에게 식사를 대접하기도 하였습니다. 의미가 있는 것은, 이 분이 원래 절약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있고 타인에게 매우 인색하게 살아왔는데, 식사를 대접하는 일로 인해 스스로 변화했다 느껴지고 자존감이 회복되는 경험이었다는 것입니다.

부인께서는 더 이상 남편의 가출과 이혼 시위에 불안해하지 않았고, 결국 이혼 요구에 동의하였습니다. 환자는 퇴원 후 집에 와서도 옥탑방에 올라가 몰래 술을 마시곤 하였는데, 그룹치료 시간에 받은 가르침대로 알면서도 무시했고 자녀들과 같이 일관적인 태도로 대응하였습니다. 가정 분위기 전체가 변화한 것이었고, 더 이상의 반전은 없었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후로 환자분이 간경화 판정을 받고 죽을 고비를 넘긴 후 의미 있는 금주가 시작되었고 부인께서는 처음으로 남편에게 감사하다,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것이 부인께는 모든 것을 보상받은 느낌이었고, 자존감이 회복되는 순간이었으며, 평등한 부부관계가 시작되는 날이었다는 것입니다.
 

사진_픽사베이


남편에 대한 이 부인의 반응 양태를 공동의존(codependence)이라고 부릅니다. 공동의존자는 정신건강 상 여러 가지 문제를 나타내는데요.

첫째, 의존자의 문제행동을 조장하게 됩니다. 초기에 의존자들이 술을 마시거나 마약을 할 때 그를 구해내고 싶다는 순수한 의도로 보호해주려 하지만 결국 이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를 경험하지 못하게 만들어 궁극적으로는 문제 행동을 악화시키게 되지요.

둘째, 중독이라는 병리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해 그 원인을 성격적 결함, 도덕적 해이, 또는 가족들이 충분히 돕지 못해서라고 결론 내리고 분노, 실망으로 고통받게 됩니다.

셋째, 부정(denial)의 특징을 보입니다. 공동의존이 있는 가족들은 가정 내에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는데 저항과 거부를 보입니다.

넷째, 의존자가 그의 행동을 조절할 수 있을 것이라는 비현실적인 기대를 합니다. 반복적인 좌절과 실패의 경험을 하면서도 이 노력이 효과가 없음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자존감이 저하됩니다. 가족들은 의존자들의 공격을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죄책감을 느끼거나 가족들이 쓸모없는 존재라고 비하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집안문제(남편의 음주 관련 문제)를 노출시키지 않고 남편을 잘 받드는 것이 최고의 미덕이었던 부인의 태도로는 환자가 변화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부인의 변화에 환자의 행동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으며, 죽음의 위기에서 받은 부인의 도움을 진심으로 감사할 수 있는 분별력이 생긴 것입니다. 그제야 평등한 관계를 회복하고 가정 전체가 회복된 것이지요.

어린왕자가 술주정뱅이가 사는 별에 가서 왜 술을 마시냐고 묻자 술주정뱅이는 괴로움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왜 괴롭냐는 다음 질문에 술주정뱅이는 술을 마셔서라고 대답하지요. 그러고 나서 어린왕자는 어처구니없어하며 별을 떠나지요.

어쩌면 공동의존자들에게 던지는 어린왕자의 지혜로운 메시지인지 모르겠습니다.

 

♦ 정신의학신문 정신건강연구소 강남센터 개소 기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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