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온안 정신건강의학과의원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우울증은 늪과 같다. 우울감은 우리들의 감정곡선을 끊임없이 아래로 아래로만 끌어내린다. 그것은 마치 강력한 자석이라도 된 듯, 일상 속 우울의 요소요소들을 끌어당겨 점차 덩치를 키워만 간다. 비대해져가는 덩치만큼 무거워지는 그 육중한 무게로 우리의 발목을 끌어당긴다. 중력이 10배는 되는 듯한 어느 외딴 별에 온 것 마냥, 그저 깊이 가라앉기만 한다. 시커먼 선글라스를 낀 듯 아무리 기분전환을 하려 주변을 둘러보아도 흑백 영화처럼 우중충한 고독감이 가슴을 메워오기만 할 따름이다. 시끄러운 예능 프로그램마저 공허하고, 음악을 들어도 멜로디 가사 하나하나가 슬퍼지기만 한다. 우울에 적셔진 마음은 눈과 귀를 먹먹하게 메워 주변의 모든 일상을 우울의 별로 끌어간다.
우울할수록 더욱 우울해지는 이러한 늪과 같은 우울증의 특징은 실제로 임상에서도 환자들이 자주 호소하는 양상 중의 하나이다. 우울증이 발병한 뒤로는 과거 즐겁게 하던 취미들도 흥미가 전혀 없고, 주변의 일상도 모두 부정적으로만 다가오게 된다고 호소한다. 애초 슬퍼할 만한 일이 있어 시작되었던 우울증이, 스스로 주변의 정상적이던 사건들마저 모두 슬퍼할만한 일로 만들어버리며 자가 증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는 기분(Mood)와 지각(Perception) 사이의 긴밀한 연결고리가 가져다 주는 양성 되먹임(positive feedback)의 무의식적인 순환이 숨어있다. 뇌의 무의식적인 자극 분별 편향으로 인한 우울감 악화와 이로 인한 감각처리 착각의 악화로 이어지는 끝없는 순환이 가속되고 있는 것이다.
Brendan P. Bradley(1997) 등의 연구에서는 실험자들에게 우울한 기분을 유도하였을 때 ‘절망’등과 같은 우울 관련 단어에 대한 경계와 집중도가 증가하는 것을 관찰하였다. 우울감의 정도와 취약성이 높을수록 부정적인 단어에 대한 경계 또한 증가되는 것을 발견했다. 슬픈 사람일수록 부정적인 단어에 더욱 경계하고 집중하게 된다는 것이다. Eva Gilboa-Schechtman 등(2002)의 또 다른 연구에서는 우울증을 앓고 있는 환자들일수록 부정적인 얼굴 표정에 대한 정보를 유독 더 잘 기억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실험 대상 중 우울증과 불안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제시된 사진의 얼굴 중에서 중립적인 표정의 얼굴들에 비해 화난-부정적인 표정의 얼굴들을 더 잘 기억하였고, 이는 우울증이 없는 불안장애 환자들에게서는 나타나지 않은 결과였다. 또, 우울증을 앓고 있는 남자 환자들이 분노, 슬픔 감정과 연관된 표정이 나타난 사진들을 선별적으로 더 오래, 잘 기억한 다는 것이 밝혀졌다.
단순히 자극에 대한 집중이나 기억과 같은 인지적인 반응 뿐 아니라 그에 대한 감정적인 반응에 대한 우울증의 영향에 대해서도 연구된바 있는데, Denise M Sloan 등(2002)은 우울증 환자들의 표정변화를 얼굴 근전도 변화를 통해 측정했다. 얼굴 근육의 변화를 통해 실험군이 행복한 표정을 짓는지, 불행한 표정을 짓는지 미세하게 측정하였을 때, 우울증 환자들이나 정상인 모두 슬픈 장면의 사진에는 슬픈 반응을 보였지만, 기쁜 장면의 자극에 대해서는 우울증 환자들의 경우에만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이다.
다시 말해 우울한 사람들은 사회적 자극이나 상황 맥락 등에 대한 인지적, 감정적 지각과 반응이 모두 우울한 쪽으로 편향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우울증 환자들로 하여금 매사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매사에 우울감을 느끼게 하는 자동적 사고에 대한 행동학적 근거를 보여주고 있다. 우울은 그 자체의 인지행동학적 특성에 의해 주체를 우울감의 악순환으로 이끌어 간다는 것이다. 슬퍼질수록 슬픔의 색안경은 더욱 짙어지고, 짙어진 색안경 너머로 들어오는 세상 모든 슬픔들로 인해 더욱더 슬퍼지는 끊임없는 우울의 악순환 말이다.
그렇기에 우울증으로 고통 받는 환자들에게 무심코 던져지는 ‘왜 그렇게 매사에 부정적이냐’ ‘더 긍정적으로 좀 생각해봐라’와 같은 일방적이고 단순한 핀잔들이야말로 그들의 아픈 마음을 더욱 후벼 파는 비수가 될지 모르는 것이다. 우울한 이들의 눈이 우울에 젖어 일상에서 긍정을 놓치는 것은 그들의 약한 의지 탓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울증은 늪과 같다. 그것은 발버둥 칠수록 더욱 빠져들고 가라앉는다. 우울증에 고통 받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늪에서 헤엄치는 법이 아니다. 그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그들이 온몸을 던져 오롯이 체중을 기대고 매달릴 수 있는 든든한 손길인 것이다. 때로는 따뜻한 공감으로, 관심으로, 때로는 약간의 약물로, 때로는 숙련된 이의 면담으로 건낼 수 있는 든든한 손길 말이다.
한양대학교병원 외래교수
저서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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