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대한소아청소년정신의학회 김지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A씨는 차를 타고 터널을 지날 때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뻐근하며 호흡이 곤란하다고 하였고 B씨는 자신의 의견을 말해야 할 때 머리가 하얘지고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고 하였다. C씨는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서 몸에 힘이 빠지면서 쓰러진다고 하였고 D씨는 감정적으로 흥분이 되면 순간적으로 머리에서 띵한 느낌이 들고 잠시 동안의 기억을 잃는다고 하였다. 모두 스트레스를 받으면 나타나는 반응인데, 왜 이렇게 다 다른 양상인 걸까?
 

사진_픽사베이


물리학에서 힘과 저항 사이의 상호 작용을 의미하는 용어로 쓰이던 ‘스트레스’라는 단어를 1936년에 ‘어떤 요구에 대해 보이는 신체의 비특이적인 반응’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것은 의사이자 생화학자인 한스 셀리에(Hans Selye)였다. 1915년에 생리학자 월터 캐논(Walter Cannon)은 급성 스트레스 반응인 투쟁-도피 반응(fight-or-flight response)에 대해 설명하였다.

외부에서 오는 어떤 자극이 뇌의 편도(amygdala)에 도달하여 위험하다고 인지되면 시상하부(hypothalamus)로 신호가 간다. 시상하부는 먼저 교감신경계를 통해 부신 수질(adrenal medulla)과 연결되어 아드레날린과 노르아드레날린을 분비하도록 자극하는데, 교감신경계가 흥분하면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혈압이 올라 근육, 심장 등 신체 중요 기관의 혈액 공급이 증가한다. 호흡이 빨라지고 기관지가 확장되며 뇌에 산소가 더 많이 공급되어 각성이 증가되고 시각, 청각, 후각 등 감각이 예민해진다. 동공이 확대되고 침이 마르고 소화 기능은 억제되며 몸에 저장되어 있던 혈당과 지방이 신체에 유리되어 에너지가 공급된다.

한편 시상하부는 HPA axis(시상하부-뇌하수체-부신;hypothalamus-pituitary gland-adrenal gland)를 통해 부신피질자극호르몬방출호르몬(CRH), 부신피질자극호르몬(ACTH), 코티졸(cortisol)을 분비하여 교감신경계의 활성을 유지하고 면역 기능과 항염증작용을 억제한다. 이것이 투쟁-도피 반응이고 사람이 위험한 상황에 노출되었을 때 대응할 수 있게 해주는 방어체계이다.

위험이 지나가면 코티졸이 감소하고 부교감신경계의 ‘브레이크 기능’이 작동하여 편안히 이완하고 쉴 수 있게 된다. 부교감신경계는 뇌신경(cranial nerve)인 동안신경(oculomotor nerve), 안면신경(facial nerve), 미주신경(vagus nerve)과 골반내장신경(pelvic splanchnic nerve)을 포함하는데, 부교감신경계가 활성화되면 동공이 수축되고 침 분비가 많아지고 심장 박동이 느려지고 기관지가 좁아지며, 소화기능이 증진되고 방광이 수축하여 소변 분비가 촉진된다.

공황장애 혹은 불안장애는 교감신경계의 투쟁-도피 반응이 과도하게 활성화된 것으로 생각되어 부교감신경계의 기능을 돕는 이완 요법, 들숨보다 날숨을 길게 내쉬는 심호흡, 복식호흡 등이 도움이 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사고, 재난, 트라우마 등을 겪고 외상후스트레스장애로 진행된 사람들은 위험한 상황에 노출되었을 때 의식과 기억을 잃거나 의식은 있지만 꼼짝도 할 수 없거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과 같은 경험을 보고하였다. 이러한 방어 체계는 얼음 반응(freeze response)이라고 불리며 이 또한 미주신경을 포함한 부교감신경계에 의해 매개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부교감신경계는 어떤 기능을 하는 것일까? 휴식과 이완 상태를 촉진하기도 하고 얼음 반응을 유발하기도 한다면 모순되는 것 아닌가?

이에 대한 답을 준 사람은 다미주이론(Polyvagal Theory)을 제창한 스티븐 포지스(Stephen W. Porges)이다. 다미주이론은 자율신경계가 계통발생적으로 구분되는 세 가지 회로와 반응 체계를 갖고 있다고 제안하는데, 첫 번째는 사회 참여 체계(social engagement system)로 얼굴 근육, 중이 근육, 후두, 인두의 조절을 통합하는 복측 수초화 미주신경(ventral myelinated vagus nerve)이 포함된 포유류의 단계이다. 두 번째는 교감신경-부신계로 앞에서 말한 투쟁-도피 반응과 관련 있으며 파충류를 포함한 척추동물이 공유하고 있고, 세 번째는 모든 것을 둔화시키는 등쪽 무수초화 미주신경(dorsal unmyelinated vagus nerve)으로 양서류, 어류 등의 원시적인 척추동물에서도 발견된다.

사회 참여 체계가 활성화되면 안전하다고 느끼고, 차분하고 명료하며 다른 사람들과 상호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사회 참여 체계가 작동할 수 없는 위협적인 상황이 되면 계통발생적으로 더 오래된 방어 체계(교감신경-부신계, 등쪽 무수초화 미주신경)의 작동이 시작된다. 교감신경-부신계가 활성화되면 투쟁-도피 반응이 생기고, 등쪽 무수초와 미주신경의 작용이 우세해지면 부동화, 해리, 셧다운, 기절 등의 현상이 나타난다. 셧다운을 예측할 수 있는 증상으로 어지럼증, 무감각증, 마비, 말이 나오지 않음, 목소리의 변화, 갑자기 느껴지는 피로감, 토할 것 같은 느낌, 식은땀, 몸이 갑자기 더워지는 느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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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러티브 노출치료의 저자인 매기 샤우어(Maggie Schauer)와 토마스 앨버트(Thomas Elbert)는 스트레스나 트라우마에 대처하기 위한 방어 연쇄 반응으로 얼음(freeze)-도피(flight)-투쟁(fight)-겁에 질림(fright)-늘어짐(flag)-기절(faint) 반응이 일어난다고 제안하였다.

처음 나타나는 얼음(freeze) 반응은 지향 반응(orienting)으로 부교감신경계에 의해 매개되며 잠시 운동반응이 정지되어 상황을 판단할 수 있게 하는 기능을 한다. 자극이 위협으로 지각되면 교감신경계가 각성되고 투쟁-도피 반응이 시작된다. 도망이나 싸움이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 겁에 질린 긴장성 부동(tonic immobility) 상태에 들어가게 되는데, 포식자는 죽었을지도 모르는 동물을 먹지 않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는 것은 위험한 상황에서 생존 가능성을 증가시킨다. 성폭력을 당하는데 전혀 움직이지 못했다고 보고하는 피해자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를 보호하는 방어기전이 작동된 것인데 그렇지 않았다면 더욱 큰 손상을 당하거나 죽임을 당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므로 저항하지 못했다고 죄책감이나 수치심을 느낄 필요가 없으며, 폭력에 노출되었던 피해자에게 “왜 더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느냐?”라고 묻는 일은 그만두어야 한다.

긴장성 부동 이후에는 등쪽 무수초화 미주신경과 관련된 부교감신경계의 지배가 우세해져서 이완성 부동 또는 셧다운 상태에 들어가 심장박동이 느려지고 혈관이 확장되어 혈압이 떨어지고 각성 상태가 감소되고 감각과 감정이 둔하고 무감각해지며 팔다리에 힘이 없고 늘어지는 상태가 되며 극단적인 경우에는 유사 혈관미주신경성 기절반응이 야기될 수 있다.

 

극도로 위험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방어 연쇄 반응은 자신의 대응 능력과 비교하여 위협을 어떻게 평가하고 지각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데, 셧다운과 해리로 진행하는 경우는 가해자가 지나치게 근접했을 때, 신체에 무언가 침투했을 때, 피를 흘리거나 보았을 때, 체액에 오염될 수 있는 상황일 때 그리고 도망가거나 싸울 수 없는 상황에서이다.

외상을 경험할 당시 셧다운까지 진행이 되었다면 이후 유발자극에 노출되거나 외상 기억이 떠오를 때 다시 셧다운과 해리가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아동기에 학대나 외상을 경험한 경우 해리 반응을 자주 보이는 이유는 아동기에는 거의 항상 투쟁-도피 반응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싸울 때 방 안에서 혼자, 혹은 거실 구석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고함 소리를 들어야 했던 어린아이는 도망갈 곳이 없고 싸움을 말릴 힘도 없고, 그저 들어도 듣지 않는 것처럼, 느껴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자신을 속이는 것만이 사는 방법이 된다.

 

다시 정리를 해보면, 스트레스 반응에 대한 학설이 대두된 초기에는 교감신경계에 의해 주도된 투쟁-도피 반응이 위험에 대한 대처로 나타나고, 부교감신경계는 이완-휴식-소화에 관여한다고 이해하였다. 그러나 트라우마 경험자들의 보고와 다양한 분야에서의 연구를 기반으로 스트레스 혹은 트라우마를 경험했을 때 나타나는 방어 반응에는 투쟁-도피 반응 외에도 얼음(freeze) 반응, 부동(immobility), 셧다운(shut down) 등의 현상이 있으며 부교감신경은 이완-휴식뿐 아니라 얼음, 셧다운, 해리 반응에도 관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안전하다고 느낄 때는 스티븐 포지스가 제안한 세 가지 반응 체계 중 사회 참여 체계(social engagement system)의 작용이 활발해진다. 타인과의 눈맞춤, 목소리의 톤과 운율의 조절, 몸의 움직임, 호흡이 상호적으로 조화를 이루면서 공명하고 공포감 없이 관계를 맺고 혼자가 아니라고 느끼며 소통하고 도움을 구할 수 있게 된다.

사회 참여 체계의 발달은 초기 아동과 양육자의 상호작용의 영향을 받는다. 애착이 안정된 경우 사회 참여 체계가 잘 작동하도록 발달하며 그런 경우 스트레스, 트라우마에 대한 회복력도 높은 편이다. 위험에 처하고 공포에 사로잡혀 사회 참여 체계가 작동하지 못하는 경우 그보다 계통발생적으로 원시적인 교감신경-부신계, 등쪽 무수초화 미주신경이 위험한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방어 반응을 시작한다. 따라서 스트레스 혹은 트라우마를 경험하고 신경계의 조절이 무너지고 불안, 공포, 무감각, 해리 반응 등이 있는 경우 가장 중요한 것은 안전함을 느끼고 사회 참여 체계의 기능을 회복하는 것이다.

안전함은 자신을 온전히 있는 그대로 섬세하게 수용하고 상호 조절에 참여하며 고통을 이해하려는 타인이 존재할 때 가능하다. 또한 요가, 노래, 춤, 호흡 등의 신체적인 접근이 사회 참여 체계의 기능을 활성화시키고 회복 가능성을 높인다는 증거들이 축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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