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전문의 x 힙합 저널리스트 연재 <마음과 힙합> 04

[정신의학신문 : 장창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앞서 랩의 치유적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내면의 목소리를 세상을 향해 외치는 것 자체로 랩을 하는 이(래퍼)와 랩을 듣는 이들 모두가 감정의 격동을 경험한다. 하지만 랩은 사실 진입장벽이 높다. 당장 쇼미더머니만 보더라도 래퍼들의 랩은 첨단을 달린다. 눈이 자막 가사를 따라가기도 바쁘다. 랩을 하려면 힙합 비트와 리듬에 익숙해야 하고, 라임과 플로우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이에 호흡과 발성까지 익혀야 된다고 하면 두 손, 두 발 다 들게 된다. 하지만 여기에 절망할 필요는 없다. 랩의 인접 영역에서 자기표현의 대안이 될 수 있는 장르를 찾을 수 있다. ‘스포큰워드(spoken word)’가 그것이다.

스포큰워드는 쉽게 말해 ‘말로 쓰는 시’라고 할 수 있다. 국내 최초로 단독 공연을 진행했던 스포큰워드 아티스트 노원스페셜(no1special, 본명: 박세준)의 말을 빌리자면 스포큰워드는 시와 랩과 연극이 접목된 혼합 예술, 혹은 시로 펼치는 공연(performance poetry)이다. 보통의 '시'는 책이나 인쇄물을 통해 사람들과 만난다. 하지만 '스포큰워드'는 쓰여진 시가 목소리와 몸짓을 통한 퍼포먼스로 발화되고 대중에게 전달된다. 즉, 시적인 글이 단순히 텍스트로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구두 퍼포먼스'로 전달되는 것이다. 목소리를 통하여 전달하기 때문에 단어의 배열과 글자의 발음에 의하여 리듬감을 느낄 수 있기도 하다. 운율이 있다는 거다. 여기에서 랩과의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운율이 있다는 것은 랩과 스포큰워드의 형식적인 유사성이라면, 이 두 장르 간에 내용적인 유사성도 존재한다. 랩과 스포큰워드 모두 ‘나’의 이야기를 담는다는 점이다. 래퍼들은 과감하게 자신의 가사에 자신의 생각과 가치관을 표출한다. 스포큰워드 아티스트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뚱뚱해서 놀림을 받은 경험, 인종차별을 받은 경험, 왕따를 당한 경험 등 자신에게 상처가 되었던 과거를 숨기지 않고 당당히 자신만의 시적인 글과 퍼포먼스로 풀어낸다. 이뿐만 아니라 갱스터랩(Gangsta rap), 물질주의 랩(Materialistic rap), 폴리티컬 랩(Political rap), 포지티브 랩(Positive rap), 영성 랩(Spiritual rap), 이모 랩(Emo rap) 등 다양한 랩이 있듯이 다양한 내용의 스포큰워드가 존재한다.

우리가 '힙합'의 기원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 중심에는 래퍼가 아닌 디제이 쿨허크(DJ Kool Herc), 아프리카 밤바타(Afrika Bambaataa), 그랜드마스터 플래시(Grandmaster Flash)와 같은 DJ가 먼저 자리한다. 래퍼의 '랩'의 기본적인 배경에는 DJ가 플레이하는 비트가 있는 것이다. 비트는 완전히 자유로운 자기표현을 하는 데 있어서 구조적 장벽으로 작용할 수 있다. 또한 비트를 타고 랩을 뱉는 것이 라임과 플로우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하는 것이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스포큰워드는 비트가 아닌 글쓴이 자신 안에 내재된 자신만의 리듬에 맞추어 흘러간다. 비트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랩보다 더욱 창조적으로 나만의 감정을 실은 목소리를 자유롭게 담을 수 있다. 이것이 랩보다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스포큰워드의 면모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스포큰워드 공연은 비트 없이 진행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포큰워드에 무조건 음악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자신이 쓴 시의 감정과 느낌을 더욱 살리고자 음악을(아주 심플한 사운드에서부터 BPM이 빠른 일렉트로닉 음악까지) 플레이하고 스포큰워드를 하는 아티스트도 다수 있다. 다만 초점은 글쓴이가 하고자 하는 말에 더 가있다고 보면 된다.
 

사진_픽사베이


스포큰워드는 자기 스스로를 돌아보고 표현하여 발화시키는 강력한 도구이다. 글을 써 내려가며 내부에 있는 감정과 생각과 기억들을 풀어낸다. 그리고 이를 자신만의 리듬에 맞추고 다듬어 가며 스스로의 생각을 정리한다. 마지막으로 직접 소리 내어 표출한다. 이를 통해 나를 표현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나아가 자기 스스로를 인정하고 포옹하는 지점까지 나아간다. 화자 입장에서는 말할 기회를 부여받고 세상 속에서의 경험과 감정을 처리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다.

반대로 청자 입장에서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된다. 스포큰워드를 통하여 우리 사회가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를 얻는 것이다. 이들이 자신들의 진실을 이야기하고 청중들은 이를 들으면서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고, 공감하게 되며, 이해하게 된다. 그저 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면 되는 것이다. 목소리를 듣는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에 있어서 핵심적이다. 이는 마치 마음의 병을 지닌 사람이 정신치료자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이 치유의 시작인 것과 같다.

실제로 미국에 사라 케이(Sarah Kay), 시에라 디멀더(Sierra DeMulder)와 같은 스포큰워드 아티스트들은 스포큰워드를 통한 마음 치유,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노원스페셜(no1special)이 이끄는 <말하는 오후(SPOKEN P.oetry M.ovement)>라는 문화 운동 단체가 있다. 이들 또한 대중이 스포큰워드를 통해 개인의 목소리를 예술적이고 창조적인 방향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장을 만들어가려고 한다.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어느 순간 사람들은 ‘우리’라는 울타리 안에 숨어 그 안에서 벗어나는 말과 행동을 자제하며 살아가기 시작하였다. 누군가는 스스로의 판단을 확신하지 못하게 되었고, 또 어느 누군가는 자신이 어떠한 감정을 느끼는지 조차도 서서히 잊어갔다.” 이런 안타까운 사회적 공기 속에서 스포큰워드는 사람들 각자가 지닌 역동을 다시 살릴 수 있는 운동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내용 외에도 랩과 스포큰워드는 많은 부분에서 연관성을 갖고 있다. 길게는 1920년대의 할렘 르네상스, 조금 가깝게는 60년대의 마틴 루터 킹 목사, 70년대의 라스트포잇(The Last Poets), 길 스캇헤론(Gil Scott-Heron), 무하마드 알리의 인터뷰 등이 랩과 스포큰워드의 교집합 영역이라 할 수 있다. 또한 2000년 이후로는 로린 힐(Lauryn Hill), 카니예 웨스트(Kanye West), 모스 데프(Mos Def)와 같은 랩 아티스트들이 스포큰워드를 대중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렸다. 누구나 일류 래퍼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수영이라는 운동을 생각해보자. 국가대표 박태환도 있고, 아침마다 수영으로 건강과 삶의 활력을 누리는 동호인도 있다. 힙합으로 눈을 돌린다. 누구나 노래방에서 노래를 즐길 수 있듯이 누구나 힙합을 랩과 스포큰워드를 통해 즐길 수 있다. 동전 500원 없이도 우리의 목소리만으로 함께 힙합을 즐길 수 있다는 것, 참 멋지지 않은가?

스포큰워드에 관심이 있다면 한국의 스포큰워드 소셜 클럽 <말하는 오후>에서 구체적인 내용 확인할 수 있다(페이스북 주소: https://www.facebook.com/spokenpm).

 

장창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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