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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마음을 읽다] 다시 사랑해도 될까요? - 이터널 선샤인(2004)
권순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 승인 2018.11.09 08:35

[정신의학신문 : 권순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그와 완전히 끝내고 나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습니다. 그는 나에게 상처를 주고 나는 그의 마음을 찢어놓았습니다. 우리의 마지막 대화는 연인의 그것이라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상대방의 숨통을 끊을 수 있을지 호시탐탐 노리는 칼잡이의 칼부림에 가까웠습니다. 그는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비열하고 인정머리 없는 사람이었으며 나는 그가 만난 가장 속물적이고 잔소리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와 함께 했던 공간들은 아무 의미도 없었으며 함께 나누었던 시간은 인생의 낭비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가장 화가 나는 것은 그런 사랑을 했던 나 자신입니다. 나의 연애는 내가 얼마만큼 형편없고 천박하고 이해심 없는 사람인지를 알게 해 주었고 나의 연애의 기억은 앞으로의 내 연애의 나쁜 결말을 암시하는 스포일러가 되어버렸습니다. 앞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자신이 없습니다. 사랑에 상처 받은 나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결국 우리는 서로를 증오하게 될 텐데 또다시 누군가를 사랑해도 될까요?”

 

여기 한 쌍의 연인이 있습니다. 얌전하고 과묵하고 수줍은 남자, 그리고 열정적이고 변덕스럽고 외로움 타는 여자. 둘은 운명처럼 서로에게 이끌리지만 어느덧 운명은 일상이, 일상은 권태로, 권태는 짜증으로 변해버립니다. 짜증으로 변한 사랑은 조그마한 균열에도 폭발해버리고 서로에게 그냥 덮어두기에는 너무나 잔인한 칼자국을 남겨버립니다. 괴로워하던 여자는 그에 대한 기억을 지우기로 합니다. 자신에 대한 기억을 지우고 너무나 평화스러워 보이는 여자를 본 남자는 자신의 기억 또한 지우기로 합니다.

극 중에 등장하는 기억을 지워주는 회사 라쿠나는 마치 우리 뇌에서 발견되는 오래된 조그마한 상처의 흔적인 열공경색(lacunar infarction)과도 같습니다. 기억을 지우고 남은 추억의 구멍이 마치 손상된 뇌에 있는 수많은 작은 빈 공간을 연상케 합니다. 기억 지우기 서비스를 신청하고 잠든 남자에게 직원들이 찾아와 기억을 지우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날 아프게 했던 당신이 사라지면 이 아픔도 사라질까요?
 


치매를 포함한 많은 기억장애를 일으키는 질환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기억은 언제나 현재로부터 과거로 사라져 간다는 점입니다. 치매가 진행될수록, 또는 예기치 않은 사고로 인해 한 번에 수십 년간의 기억이 사라지는 순간에도 오래된 기억은 마지막까지 남게 됩니다. 마치 우리 가슴속에 남아있는 첫사랑의 가슴 떨리지만 씁쓸했던 기억처럼요. 생의 마지막까지 남게 되는 오래된 기억, 인생의 마지막에 비로소 생생하게 겪게 되는 순수한 기억, 그것은 축복일까요 아니면 짓궂은 저주일까요?

영화 속의 남자의 기억 또한 현재로부터 과거를 향해 지워져 갑니다. 서로가 서로를 향해 증오 섞인 말을 꺼냈던 그들의 마지막 순간이 지워지고 사랑이 안정되었을 때 무심코 내뱉은 무신경한 말들이 지워져 갑니다. 사랑의 기억이 지워지는 순간의 미묘한 시간차로 인해 아이러니하게도 남자는 서로의 권태가 뱉어낸 상처가 없는 순수한 사랑의 순간에 다시 한번 도달하게 합니다. 그리고 남자는 외칩니다.

“기억을 지우고 싶지 않아요! 나 이거 취소할래요!”

 

이 순간을 지우고 싶지 않았던 남자는 자신의 기억 속에 그녀의 기억을 숨기기로 합니다. 그녀의 기억을 숨기기에 가장 적합한 기억은 어디일까. 아무래도 가장 마지막까지 남을 것이 분명한 기억, 즉 어린 시절의 기억에 그녀를 숨깁니다. 어린 시절의 그는 너무나 바쁜 엄마의 사랑을 갈구하던 외롭고 초조했던 소년이었습니다. 자신의 어린 시절에 숨긴 그녀의 기억은 어머니의 사랑에 목말라하던 기억 속의 어린 자신을 어루만집니다.

이번에는 그녀를 자신의 인생에 가장 창피했던 순간에 숨겨놓습니다. 자위를 하다가 어머니에게 들켰던 수치스러운 순간에, 자신의 남자다움을 증명하기 위해 죄 없는 어린 새를 죽여야만 했던 그 비겁한 순간에 말이죠. 수치스러운 기억 속에 숨겨놓은 여자의 기억은 약하고 어렸기에 그래서 비겁할 수밖에 없었던 그를 위로합니다.

 

우리의 뇌의 ‘변연계’라고 불리는 부분에 ‘편도(amygdala)'라는 기관이 있습니다. 두려움을 처리하는 중심기관입니다. 어린아이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절대 다가가지 말아야 할 것, 즉 두려움을 아는 것이 필수이기 때문에 편도에는 우리가 두려워하는, 또는 두려워해야 할 것들이 생의 초기부터 일찌감치 입력됩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사회에서 버림받지 않기 위해 느끼게 되는 가혹한 감정인 ‘수치심’도 이때 생성됩니다. 슬프게도 우리가 우리의 뇌를 조절할 수 있게 되기 훨씬 전부터 편도는 성숙하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으로부터 버림받는다는 아주 조그마한 가능성만 느껴도 절망을 느끼고 공포에 질리게 됩니다.

편도의 바로 뒤쪽 인접한 부분에는 ‘해마(hippocampus)'라 불리는 사건 기억(episodic memory)의 형성과 관련되는 기관이 있습니다. 해마는 기억의 중추로써 우리가 경험한 사건 대부분이 해마에 저장되게 됩니다. 만일 이 부분이 완전히 손상된다면 우리는 우리가 경험한 모든 사건을 수초 내에 잊어버리게 됩니다. 해마의 성숙은 편도의 그것보다 훨씬 늦어 초기 성인기에 이를 때까지 성숙이 계속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해마에서 새로 생성해내는 기억에 의해 어릴 적 우리에게 각인된 절망과 공포를 극복하게 됩니다.

즉, 편도는 우리가 생존에 필요한 공포를 느끼게 만들지만, 해마는 우리의 삶의 경험을 통해 공포를 극복하게 합니다. 사람을 두려워하고 자기 자신을 창피해하던, 그래서 냉소적일 수밖에 없었던 남자가 여자를 만나 사람에 대한 새로운 기억과 믿음을 가지게 되고, 이를 통해 인생의 두려움을 극복하듯이요.
 


서로에게 던졌던 그 모진 말들은 정말 서로를 향했던 게 맞나요? 우리는 완벽하지 않아요. 영화에 등장하는 두 남녀처럼요. 이들은 다른 로맨스 영화 속 남녀처럼 매 순간 완벽하게 예쁜 모습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현실 속의 우리들처럼 경솔하기도 하고, 이기적이기도 하죠. 그리고 각자만의 아픔과 열등감이 있습니다. 그래서 매 순간 서로를 완벽하게 보듬어주지도 지켜주지도 못하죠. 그리고 자신들의 마음속에 숨어있는 수치심과 공포에 압도되어 눈 앞에 있는 가장 소중한 사람들에게 날 선 말들을 내뱉기도 하죠.

결국 그녀의 기억을 잃지 않으려는 남자의 슬픈 시도는 끝내 실패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남자는 그가 처음으로 여자를 만나 사랑을 느꼈던 해변 속 외딴집으로 돌아갑니다. 용기를 내지 못해 그녀와 함께 하지 못했던 그 기억 속에서, 그리고 그 기억마저 무너져버리는 그때에 남자는 고백합니다. 자신이 항상 물에 빠진 아이처럼 겁에 질려 진심을 전하는 것을 두려워해왔음을요. 그리고 그녀의 기억은 작별인사를 나누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를 위로합니다.

그리고 현재 시점의 발렌타인 데이, 둘은 운명같이 다시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 잔인하게도 둘은 자신들이 한 때 연인이었음을,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받고 기억 속에서 서로를 지웠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들은 회사에서 보내온 테이프를 통해 한때 그들에게 벌어졌던, 그리고 앞으로 높은 확률로 그들의 앞에 벌어질 사랑의 비참한 결말에 대해서 미리 알게 됩니다. 둘은 두려움에 빠집니다. 그리고 사랑에 상처 받은 나는 묻습니다.

“우리는 결국 서로를 증오하게 될 텐데 또다시 누군가를 사랑해도 될까요?”

 

사랑의 상처에 절망한 남자가 이 아픈 사랑의 기억 속에서 마지막까지 남기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남자가 마지막까지 남기고 싶었던 기억은 그녀의 머리 색을 닮은 오렌지 빛 이불에 둘러싸여 과거의 상처에 눈물을 흘리던 여자를 감싸 안던 그 순간이었습니다. 언제 깨질지 모르는 얼어버린 강물 위에 둘이 누워 아주 멀리 떨어진 별자리를 함께 바라보던 그 순간이었습니다. 두려움이 많아 늘 단단한 갑옷을 둘렀던 그가 갑옷을 벗고 남에게 능동적으로 다가갔던 유일한 순간이었으며 언젠가 깨질지도 모르는 감정 하나에 의지하여 둘이서 막연하기 짝이 없는 영원을 꿈꾸던 그 순간이었습니다. 영화는 이렇게 모든 연인이 사랑을 하며 한 번은 도달했던 영원한 햇빛의 순간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 남자는 용기를 내어 여자를 뒤쫓아가 위로의 말을 건넵니다.

“괜찮아.”   라고 말이죠.
 


영화는 비록 사랑의 결말이 아프다고 하더라도 모든 사랑의 순간이 상처는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누군가와 사랑을 하면서 우리는 비록 영원하지는 않지만, 우리를 일평생 위협해왔던 혼자라는 공포에서 잠시나마 벗어납니다. 그리고 이 아주 찰나의 순간의 행복한 기억이 나를 평생 얽매고 지배해왔던 수치심과 자기의심이라는 감정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이 아주 작은 순간 우리는 아무 의심 없이 타인과 자신을 믿게 되죠. 비록 이것이 언제 깨질지 모르는 얼어붙은 강물과 같이 위태롭더라도, 수천 광년 떨어진 밤하늘의 별처럼 막연하더라도 말이죠.

영화는 전합니다. 사랑의 결말만큼이나 중요한, 둘이 나누었던 교감과 위로의 가치를 말이죠. 그리고 비록 사랑이 서로에게 상처를 남기게 될지라도 그것은 우리가 형편없는 사람이라는 증명이 아니라 우리가 사람이기에 기억 저편에 어쩔 수 없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외로움과 고독을 극복하기 위한 끊임없는 시도 중 하나였음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완벽한 짝을 만나 영원한 결말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서로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두 명이 만나 근거 없는 믿음과 신뢰로 서로를 보듬는 과정이니까요. 그리고 이 찰나의 기억은 영화의 제목처럼 불완전한 우리를 비춰주는 티 없는 마음의 영원한 햇빛(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이 될 것입니다. 다시 사랑하세요. 그리고 다시 상처 받는다고 하더라도 당신과 당신의 사랑의 가치를 의심하지 마세요.

 

권순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wanderag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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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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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석기 2018-11-15 18:39:18

    제가 생각지도못한부분을 이렇게 해석해주시니 새로운 각도로 영화가 보이네요 잘읽었습니다 다음기사도 기대할게요   삭제

    • Love u darling 2018-11-10 12:22:29

      감동받고 위로받고 갑니다.
      이 글 지우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어요 또 와서 계속 보고싶으니까요!ㅜㅜ   삭제

      • 독자 2018-11-09 21:32:23

        와 소설가보다 글 잘 쓰시네요 첫문단 SNS에 공유하고싶을 정도로 잘 쓰셨어요... 출처밝히고 기사 공유해도 될까요   삭제

        • 김가 2018-11-09 10:09:21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요?

          이기적이고 불완전한 나를
          잊게 할 만큼의
          추억을 간직케 하는 것인가~!   삭제

          • 잘읽었어요 2018-11-09 09:49:14

            글이 너무 좋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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