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김정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왜 가정폭력 피해자는, 자신을 도와주려고 하는 선생님이나 의료인을 오히려 방해하고 힘들게 하는 것일까?

이런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정폭력의 특성을 알아야 한다.

가정에서 폭력이 정당화될 수 있는 상황은 거의 없다. 피해자의 정신적 문제나 행동 방식으로 인해서 가정폭력이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연구에서도 주로 가해자의 특성을 분석하고 분류한다. 즉 가정폭력은 때리는 사람의 성격특성이나 정신적인 문제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는 얘기다. 강서구 전처 살인사건의 유족들의 말처럼, 그저 구실을 잡아 때리는 것이고, 때릴 수 있으니 때리는 것이다. 가해자는 종종 술에 취해서 실수로 때린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으나, 반대로 때리기 위해 술을 마신다는 연구도 있다. 이런 이유로 “네가 그렇게 하니깐 집에서 맞고 살지.”라는 말은 잘못된 말이며, 해서는 안 되는 말이다.

 

가정폭력의 원인이 가해자에게 있다고 하더라도, 가정폭력의 영향은 피해자의 정신세계에 광범위한 영향을 주게 된다. 누구나 처음에는 가정폭력에 저항을 한다. 아직은 자존감이 높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자신은 ‘밥에 콩이 들어가서.’ 같은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맞을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는 주변에 도움을 청하기도 한다. 하지만 주변에 도움을 청해봤자 가정폭력이 해결되지 않으며, 오히려 도움을 청했다는 이유로 가정폭력은 심해지게 된다. 피해자는 도움을 청하는 것이 역효과가 난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뒤로는 최대한 가해자를 자극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눈치를 계속 보면서, 가해자가 싫어하는 것을 최대한 피하고, 좋아하는 것을 챙겨주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자존감이 낮아지는 정도가 아니라, 자아 자체가 희미하게 된다. 나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의 선호, 기분만을 생각하게 되면서 자신을 잃어가는 것이다. 나란 존재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에게 소속된 누군가로, 가해자의 한 부분으로 살아가기 시작한다. 그렇게 완전히 가해자의 일부로 존재하게 될수록, 피해자는 더 이상 현실의 누군가에게 도움받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도망치려고도 하지 않는다. 내 발바닥이 나에게서 도망치려고 하지 않는 것처럼, 또 내가 내 발바닥이 도망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이상한 공생체가 된다. 다만 내일은 조금 덜 고생하기를 원할 뿐이다. 그리고 가끔은 기적이 일어나기를 원할 뿐이다.
 

사진_픽셀


맞는 것이 두려운 사람은 때리는 사람을, 당연히 피한다. 가정폭력 피해자는, 단순히 맞는 것이 두려워서 저항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가정폭력 피해자들이 피할 수 없는 이유는 가해자를 피할 수 없다는 강력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고, 그 믿음을 가해자가 폭력으로 강화시킨다.

이런 이유로, 피해자는 스스로 가정폭력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심지어 가정폭력을 의심하고 주변에서 도움을 주려고 하면 피해자는 거부하고 저항한다. 지금까지 일그러진 형태로 적응해 온, 공생 관계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도움을 주려는 쪽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처벌하기를 원치 않는 상황에서 자신의 도움은 의미가 없을뿐더러, 오히려 본인이 다양한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나에게 큰 피해가 없을 때 남을 도우려 하기 때문에, 선생님도, 의사도 피해자가 원치 않는 기색이 보이면 저 멀리 물러나게 된다.

이런 상황이 흔하기 때문에, 가정폭력처벌법에서는 가해자가 반대하든, 피해자가 반대하든 즉시 신고를 해야 한다고 나와 있다. 일단 폭력을 더 이상 당하지 않게, 피해자를 분리해서 치료를 받게 하여 회복시키고, 가해자의 일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온전한 정신으로 돌아와서 상황을 다시 판단할 수 있게 도와주려는 의도이다.

하지만 피해자가 반대를 하는 상황에서 신고를 해도, 피해자는 안전히 보호받기 어렵고, 제대로 된 치료를 받는 것도 어려운 상황이다. 전국에 가정폭력 쉼터는 66개뿐이고, 피해자 남성을 위한 쉼터는 없으며, 종종 모텔을 쉼터로 이용하기도 한다. 안전의 확보는 치료의 기본인데, 기본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치료가 효과가 나타나기 어려우며, 피해자는 원래의 자기 자신을 온전히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쉼터에서 피해자는 가해자와 하나의 공생체였던 기억을 더듬어, 자발적으로 가해자에게 돌아가기도 한다. 결국 도움을 준 입장에서는 자신의 도움이 피해자에게 실제적인 도움이 되지도 않았고, 자신만 위험해지고 불편해지는 상황이 된다.

 

가정폭력 즉시 신고 의무가 있는 사람들 중, 의료인은 몇 가지 문제를 더 고민해야만 한다.

먼저 신고해야 하는 가정폭력에 대한 세부적인 규정이 없다는 것이다. 국내는 아직 가정 폭력이 흔하며, 특히 정신과를 방문하는 환자들은 거의 대부분이 가정폭력 경험이 있다. 법적으로는 공소시효가 지나지 않았다면 이 모든 사항에 대해서 즉시 신고를 해야 한다. 심지어 진료 시점은 만 19세 이상이더라도, 19세 이전에 가정폭력이 있었다면 신고해야만 한다. 의료인은 이 모든 가정폭력 사건을 경찰과 법원이 모두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심지어 종종 피해자가 더 고통받게 되는 경우도 생긴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이혼을 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법원이 가해자에게 벌금형을 내리면, 피해자의 삶도 함께 궁핍해 지기 때문이다. 피해자 입장에서는 맞는 것도 서러운데, 밥도 굶어야 한다. 혼란스럽다.

또, 어느 정도가 ‘즉시’인지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 병원에서 가정폭력이 들킬 것을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걱정하기 때문에, 여러 병원을 한 번씩 돌아다니면서 진료를 한다. 다음에 방문할 가능성이 낮기 때문에, 의료인은 의심이 되는 즉시 신고를 하는 것이 이론적으로는 타당하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현실적인 이유로 모두를 신고할 수 없다. 거기에 더해 의료인과 환자의 관계 때문에 즉시 신고는 더 어렵다.

의료인은 환자를 기계적으로 치료하는 것이 아니다. 치료의 시작은 환자가 의료인을 믿게 만드는 것이다. 믿음이 없다면, 어떤 치료도 효과가 없으며, 치료 자체를 시작하기도 어렵다. 만약 가정폭력을 의심하여 의료인이 신고를 하려 할 때, 피해자가 반대를 한다면 의료인은 고민을 할 수밖에 없다. 신고를 하면 피해자와의 관계는 단절될 수밖에 없고, 관계가 단절되면 의료 서비스를 더 이상 제공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아파서 병원에 온 피해자에게, 의료인의 선택으로, 의료 서비스를 제공을 하지 않게 되는 셈이다. 환자를 잃는 상황은, 의료인이 가장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 중 하나이다.

어떤 의료인이 이런 혼란, 스트레스, 위험을 감수하면서 까지 법을 열심히 지키려 할까.

 

심지어 의료인 등이 즉시 신고의무가 있는 법이 가정폭력처벌법뿐이 아니다. 아동학대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까지 총 3개의 법률에서 의료인 등은 해당 사건이 의심될 때 즉시 신고를 해야 하며, 이를 어길 시 과태료를 부과한다고 나와 있다.

모두 좋은 의도로 만들어진 법이다. 하지만 이 법이 원활하게 돌아가기 위한 핵심 중 하나는, 신고 의무가 있는 자들의 성실한 참여인데, 그들을 참여하게 만드는 장치가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의료계를 예로 들자면, 국공립 의료기관이나 정신건강복지센터에 가정폭력, 아동학대, 아동성폭력을 담당하는 부서를 만들어 그 부서에서 치료와 경찰과의 협업을 담당하게 하고, 그 외의 의료기관에서는 피해자를 식별하면, 경찰을 불러 피해자를 연계해주는 방식도 생각할 수 있다. 의료인은 피해자를 의료인에게 보내는 것이, 경찰에 보내는 것보다 심리적 부담이 덜하며, 이는 의료인이 아니라 선생님 등 다른 직종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또 담당 부서에서는 노하우가 쌓여 한 건 한 건에 대한 부담이 줄어들어 일의 효율도 높아질 것이며, 더 발달된 정책을 제안할 수도 있게 될 것이다.

 

법을 만든 의도가 좋아도, 법의 도움을 받을 사람들이 식별되지 않고, 법을 집행할 수단이 마땅치 않다면 현실에서는 피해자의 고통만 커지게 된다. 따라서 신고자들의 성실한 참여를 유도하는 방법이 논의되어야 하며, 동시에 가해자 감시와 피해자의 보호 및 치료에 대한 방법이 개선되어야 한다.

법이 현실적으로 바뀌기 전까지, 신고 의무자들, 선생님과 의사들이 해야 할 일은 가정폭력*이 의심되는 경우 적어도 동료들에게 그 사실을 공개하고 조언을 구하는 것이다. 누구나 끔찍한 폭력 상황을 듣거나 상상하면 무섭고 위축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다. 주변 동료들에게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한다면, 스스로를 보호하는 동시에 법적인 의무를 다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강서구 전처 살인 사건은 충분히 예방할 수 있었던 사건이다. 법이 가지고 있는 결함이, 친척과 이웃주민, 선생님, 의료인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고, 수많은 사건 방지의 기회를 놓치면서 결국 차가운 주차장에서 한 생명이 살해당하게 만들었다. 무대 위에는 잔혹한 가해자와, 피해자, 세 자매, 경찰만 보일 뿐이다. 하지만 무대 위의 그림자 속에는, 그리고 무대 뒤에는 더 많은 인물들이 숨을 죽이고 있다. 이들이 밝은 무대 위로 나와 가해자를 막고, 피해자를 구하는 때가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 가정폭력뿐 아니라, 아동학대,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에서도 신고 의무자와 의무는 동일하며, 의심 즉시 신고해야 합니다. (하단 관계 법률 참고)

가정폭력처벌법 http://www.law.go.kr/법령/가정폭력범죄의처벌등에관한특례법
아동학대처벌법 http://www.law.go.kr/법령/아동학대범죄의처벌등에관한특례법
청소년성보호법 http://www.law.go.kr/법령/아동ㆍ청소년의성보호에관한법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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