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김정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가정폭력은 1990년대가 돼서야 사회적 문제로 인식되었다. 그전까지는 사생활로, 집안의 일로 여겨 공식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미국 등 해외에서 먼저 사회적 문제로 인식되고 조사를 하기 시작했으며, 우리나라도 그리 늦지 않은 시기에 조사를 시작했다. 1993년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외국보다 가정폭력의 빈도와 강도 모두가 심한 편이었다. 부부폭력의 연간 발생률은 30.9%(남편이 구타하는 경우 37.5%, 아내가 구타하는 경우 23.2%)로 미국의 세 배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초등학생 자녀 구타율은 66.2%로 중국과 비슷했다. 하지만 심한 구타의 비율은 우리나라가 더 높았다. 중고등학생 자녀 구타율은 39.1%로 중국의 세 배였다.   

여성가족부에서 2016년에 발표한 가정폭력 실태조사에서, 최근 1년간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신체적, 정서적, 경제적, 성적 폭력 중 하나라도 경험했다고 14.1%가 응답했으며, 상대방의 행동을 제한하거나 지속적으로 위치를 확인하는 방식의 폭력인 ‘통제’를 포함하면 41.5%가 폭력을 경험했다고 응답했다. 이는 37.5%가 신체적, 정서적, 경제적, 성적 폭력 중 하나라도 경험했다고 응답한 2013년 조사와 비교했을 때 낮아졌지만, 아직 높은 수치이다.   

가정폭력률이 높다는 것은 많은 이들이 가정폭력의 가해자 또는 피해자라는 의미 이외에, 특정 계층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실제로 소득 수준, 교육 수준, 종교, 연령에 상관없이 모든 계층에 가정폭력이 골고루 존재한다는 여러 국내 연구가 있다. 가정폭력은 사회경제적인 이유보다는 가해자의 인격 특성과 관련이 있으며, 가해자의 88%는 가정폭력의 피해자였다. 조현병이나 망상장애 같은 정신질환이 가정폭력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경우는 드물며, 원인인 경우에도 병적 증상이 악화된 시기에 일시적인 폭력을 저지르는 것으로 밝혀졌다. 

 

국내에서는 가정폭력이 너무 빈번했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문제를 부정하고 축소하려고 해왔다. 셋 중 하나가 폭력의 가해자이거나 피해자인데 모두 숨기고 있으니, 가정폭력은 심각한 범죄이고, 가해자를 더 강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는 가정폭력을 폭력 사건이 아니라 가족 간의 갈등으로 축소 왜곡시켜 보게 했으며, 가정폭력 가해자에 대한 미온적인 법이 만들어지게 했다. 20년 전에 만들어져 20번의 개정을 거친 법이지만, 아직도 경찰이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20년 동안 지속된 가정폭력 속에서, 피해자 주변에는 적어도 50명 이상의 친척과 이웃 주민들, 선생님들, 의료인들이 침묵한 이유도 이런 사회적 분위기와도 관련이 있다. 소득 수준, 교육 수준, 종교, 연령과 상관없이 가정폭력은 일어나기 때문에 선생님들도, 의료인들도, 대략 절반은 가정폭력에 노출된 적이 있을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가정폭력을 외면하고 부정한 것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나도 자녀를 때려본 적 있는 마당에, 다른 집의 가정 폭력에 대해 어떻게 항의하고 신고한다 말인가. 또 나도 맞고 내 친구도 맞고 자란 마당에, 가정폭력이 무슨 신고할 사건이란 말인가.
 

사진_픽셀


하지만 이들 중에서, 법적으로 침묵하면 안 되는 사람들도 있다. 바로 선생님들과 의사를 포함한 의료인들이다.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이하 가정폭력처벌법)의 제4조 2항에는 가정폭력 상황이 의심이 되는 즉시 신고해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을 명시해 놓았다. 아동의 교육과 보호를 담당하는 기관의 종사자와, 아동이나 노인, 그 밖의 정상적인 판단 능력이 결여된 사람의 치료를 하는 의료인 등이 해당한다. 이 규정을 근거로 신고를 했을 때, 신고자에게 불이익을 주는 것은 금지되어있다. 또한 신고 의무가 있는 사람이 신고를 하지 않은 경우에는 3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받게 된다. (2014년 개정)

이런 법적인 의무를, 선생님과 의료인들은 왜 저버렸을까. 단순히 가정폭력을 은폐하려 하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이들이 자신의 의무를 외면한 것은 아니다.

 

먼저 신고를 했다는 사실만으로, 가정폭력 가해자에 의해서 자기 자신이 위협받을 가능성이 높다. 내가 도와주려고 하는 피해자처럼, 나도 피해를 받지는 않을까 두렵기 때문이다. 경찰이 나를 보호할 수 없다는 생각이 이런 두려움을 더 커지게 한다. 피해자를 설득해서, 피해자의 손으로 신고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제삼자인 자신의 손으로 경찰에 신고를 하기 때문에 이런 두려움이 더 클 수밖에 없다.

또 신고 의무자는 보통 자신의 직장에서 가정폭력 상황을 의심하게 된다. 어린이집, 유치원, 학교, 병원 같이 자신이 근무를 하는 곳에서 말이다. 이런 경우 신고를 했을 때 자신이 근무하는 직장 관리자에게 부당할 대우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가정폭력을 신고한 이후 관리자의 압박으로 직장을 잃은 사례도 있다. 이렇게 직장을 잃었을 때 보상을 받기 위해서는 소송을 걸어야 한다. 소송에는 돈과 시간이 들어가며, 충분히 보상받을 수도 없다. 또 이전 직장에 소송을 걸게 된다면, 다음 직장을 구하기는 훨씬 더 어려워진다. 전문직의 세상은 좁아서 소문은 빠르게 퍼지며, 이런 소문이 있는 사람을 고용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국공립 시설에 근무하는 선생님이나 의료인의 경우 상대적으로 이런 위험은 적다. 하지만 다른 고민은 비슷하다. 가정폭력으로 경찰에 신고를 한 이후의 상황이 생각대로 잘 풀리지 않기 때문이다. 신고를 받은 경찰이 집으로 출동을 해도, 가해자가 현관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집 문을 부수고 들어가면, 그 비용을 경찰이 자비로 물어줘야 하기 때문이다. 의미 없는 실랑이를 하다가 경찰은 돌아가게 되고, 결국 가정폭력을 신고한 선생님이나 의료인도 쉽게 가해자의 위협을 받을 수 있게 된다. 경찰이 현장에 제대로 출동해서 가해자를 체포해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경찰이 가해자와 피해자를 분리시켜놓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있는 집으로, 가해자는 돌아오게 된다.

 

두려움, 직장에서의 부당한 대우와는 별개로, 신고를 해 봤자 달라지는 게 없다면 누가 신고하고 싶겠는가. 화재 신고를 해도 소방차가 오지 않는다면, 누가 신고를 하겠는가.

하지만 가정폭력을 신고할 의무가 있는 선생님, 의료인 등을 가장 방해하고, 힘들게 하는 것은 사악한 가해자도 아니고, 이기적인 관리자도 아니다. 바로 가정폭력을 당하고 있는 피해자, 본인이다.    

 

 

참고자료

Kim KI, Cho YG. Epidemiological study of spousal violence in Korea, 1993
가정폭력실태조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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