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대한정신건강의학과 봉직의협회 신예니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본 칼럼에서는 다양한 색채의 정신건강의학과 진료실 이야기들을 컬러 박스에 담아보고자 한다. 색상을 매개로 한 정신과 진단명, 증상들, 상태 등을 본인의 임상 경험과 인문학적 지식, 그리고 정신의학의 틀로 재해석하여 색채심리학이나 컬러테라피와는 또 다른 방향에서 인간의 심리와 정신에 대한 친근한 접근을 꾀하고자 함이다. 오늘 첫 “진료실 컬러 박스”에는 흰색과 검정의 무채색 거짓말을 담아본다.
 

컬러박스(그림_신예니)


I.  거짓말의 색깔: 하얀 거짓말(white lie)과 까만 거짓말(black lie)

주사실에서 터져 나오는 아이 울음소리. 이곳은 순간 어웅하고 웅숭깊은 동굴이 되어 그 울음의 잔향(殘響)을 울리고 또 울린다. 아이는 주사 처방을 받았나 보다. 아마도 주사는 안 맞는다거나, 하나도 안 아프다는 말을 듣고 온 것 같다.

“압, 압, 압빠아~~! 아니야, 아니야~! 안 할 거야! 아빠한테 갈래에~! 아빠, 아빠, 아, 아, 아, 아, 아야~! 하지 마아~~! 아빠~ 아빠~~ 엉~~~~ 에~~ 아~ 엣~ 에이, 에이 아빠~ 압~빠아~! 앙!”

잠시간의 격한 부스럭거림 후, 간호사의 화창한 폭풍 칭찬이 이어진다. 

“어이구~ 잘 했다~! 우리 ㅇㅇ, 씩씩하네. 주사도 잘 맞고~!”

그 너머 간간이 들려오는 울음 뒤 아이의 딸꾹이 소리, “업~! 업~! 업~!” 

비명의 스콜, 오열의 폭풍우가 잦아들고 또옥 똑 여운의 빗방울 떨어지듯, “업... 업... 업...” 그리고 이내 퍼져나가는 고요...... 

끝난 줄 알았을 때 튀어나온 아이의 앙칼진 목소리, “아빠는 거짓말쟁이야!”

 

진료실에 앉아 순전히 청각으로 마주해보는 주사실 풍경이다. 아이에게 아빠는 거짓말쟁이였다. 아빠의 입장에서는 ‘아들을 위해서’ 할 수밖에 없었을 선의의 거짓말, 이름하여 하얀 거짓말이었지만 그 대가로 아빠는 아들의 공격적인 시선을 잠시간 감내해야만 했다.

하얀 거짓말은 타인을 배려하기 위한 사회적 관습으로서 대인관계의 ‘윤활유’이자 ‘대화의 양념조’ 역할을 해왔다. 지난 연말 극장가를 뜨겁게 달구었던 ‘천만 영화’ <<신과 함께―죄와 벌>>(2017)에서도 어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한 장남의 편지는 플롯을 진행시키는 중요한 모티브였고, 아이의 꿈을 탐색하면서 가족, 아픔, 이별의 이야기를 치유적인 스토리텔링으로 풀어가는 영화 <<몬스터콜>>(2016)에서도 하얀 거짓말은 공감의 사회적 장치로 읽힌다. “인간은 참 복잡한 존재들이야. 너희는 위안이 되는 거짓말(comforting lies)을 믿지. 그 거짓말들을 해야만 하는 고통스러운 진실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라는 몬스터의 대사는 우리의 마음이론(Theory of Mind, ToM) 체계를 일깨우는 역할을 한다.  

거짓말에 색깔을 부여하는 작업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존재해 왔다. ‘거짓말’이라는 단어 자체는 900년경 처음으로 인용되어 여러 형태로 쓰였지만, 이 단어들에 색채가 가미된 것은 500년 이후의 일이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이하 OED로 표기)>>이 기록하는 최초의 ‘흰색’은 14세기에 ‘악의나 악한 의도로부터 자유로운, 도움이 되는, 순결한, 해롭지 않은’ 의미를 시작으로, 이후 수 세기 동안 ‘도덕적인, 영혼의 순결함’을 상징해왔다. 영어권에서 ‘선의의,’ ‘이타적인,’ ‘친사회적인’과 같은 수식어와 어울려 쓰이는 하얀 거짓말은 OED에서는 ‘타인의 감정을 상하지 않도록 사용하는 해롭지 않고 사소한 거짓말’로 정의되며, 16세기 셰익스피어의 한 서신에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단언컨대 그는 (하얀 거짓말을 제외하고는) 어떤 허위나 여타 눈에 띄는 죄악이 없습니다.” "I do assure you he is vnsusspected of any vntruithe or oder notable cryme (excepte a white lye)." 이 구절의 명확한 기원을 집어내지는 못하더라도 흰색은 선, 검정은 악이라는 대비로 읽혔던 당시 대중문화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흑백(그림_신예니)


그리하여 거짓말에 유채색을 입히기 전, 하얀 거짓말의 대척점에는 ‘해로운,’ ‘이기적인,’ ‘뻔뻔한,’ ‘뻔하고 노골적인,’ ‘사리사욕을 채우는’ 등의 부정적 형용사의 수식을 받는 까만 거짓말이 있었다. 2008년 트리니티 대학의 에린 브라이언트는 ‘진짜 거짓말(까만 거짓말을 일컫는 이름이다), 하얀 거짓말, 회색 거짓말’을 ‘거짓말의 의도, 결과, 수혜자, 솔직성, 수용성’이라는 5가지 요소로 나누어 거짓말의 유형분류체계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또한 이득과 손해의 관점에서 거짓말을 분석한 마크 폴리는 ‘타인-손해,’ ‘자신-이득’인 경우를 까만 거짓말로, ‘자타-이득’인 경우를 회색 거짓말로, ‘자신-손해’를 감내하고서라도 ‘타인-손해’를 끼치려는 악의에 찬 거짓말은 빨간 거짓말로 분류하여 현재의 분류와는 차이를 두었다. 국립국어원에서는 ‘뻔히 드러날 만큼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새빨간 거짓말’로 강렬하게 정의하고 있으며, 피천득의 수필 <이야기>에서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기 위해서 하는 거짓말은 칠색이 영롱한 무지갯빛’으로 표현하는 만큼, 거짓말에 대한 다양한 분류와 정의는 오랜 관심에 대한 방증이라 하겠다.
 

회색-빨강-무지개(그림_신예니)


뇌과학의 관점에서 거짓말은 일종의 ‘노동’이자 ‘인지적 메커니즘’이며 사실을 말할 때보다 더 높은 각성 수준을 요하는 작업이다. 상대방이 아는 사실과 듣고자 하는 바를 고려하면서도 자신의 의도에 부합하는 내용으로 조직해야 하니 그 과정은 마음이론 체계를 활성화시키는 작업이기도 하거니와, 이전에 했던 거짓말을 기억하고, 앞으로의 내용을 계획 및 조직함은 물론, 내 안의 죄책감과 감정 시스템을 통제도 해야 하니 납득이 된다. 과거 ‘거짓말 탐지기’로 불리던 폴리그래프를 활용한 진실 찾기 수사는 1992년 연구를 시작으로 ‘두뇌 피질 경찰(the cortex cop)’로서의 fMRI(기능성자기공명영상)의 활용 가능성을 제시해왔고, 미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들에서는 뇌파를 활용하여 죄의 유무나 뇌의 흔적, 즉 뇌지문(腦指紋, brain fingerprinting)을 통해 뇌의 인지 처리 과정을 살피는 과학적 접근을 실제 범죄 수사에 활용하기도 한다.

fMRI를 이용한 거짓말 연구 중 눈여겨볼 만한 것은 하얀 거짓말에 관한 것이다. 인간 본성에 대한 논의는 성악설과 성선설로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지만, 거짓말에 관한 한 인간에게는 거짓말에서 비롯되는 불편한 감정의 발로가 있다. 진실을 말할 때는 거의 비활성 상태이던 감정, 갈등, 인지 관련 뇌 부위가 거짓말을 할 때는 불타오르듯 활성화된다. 달리 말하면, 선의의 거짓말이든 악의의 거짓말이든, 희든 검든 거짓말은 양심의 가책과 불편한 감정을 일으켜 편도체를 활성화시킨다. 속이려는 의도 자체는 편도체를 깨우고, 실제로 언어화되는 거짓말은 뇌 ‘내부 편집자’인 미상핵의 스위치를 켬으로써 가책을 받는다고 보는 입장도 있다. 흥미로운 점은, 선의의 하얀 거짓말이라 할지라도 그 빈도나 횟수가 증가하면 편도체의 민감도가 저하되어 거짓말에서 오는 불편한 마음을 (느끼게 하는 뇌 부위를) 둔감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즉, 거짓말에 능숙해지는 것이다.
 

사진_픽사베이


병적 거짓말(pathological lying)은 정신건강의학과 진단 및 통계 분류(DSM) 3판에 기록된 진단명이었으나, DSM-IV,  DSM-5로 오면서 진단명에서는 삭제되었고, 현재는 사이코패스, 반사회적 인격 장애, 자기애성 인격 장애, 히스테리성 인격 장애 등에서 나타나는 임상 증상으로 존재한다. 병적으로 충동적 거짓말이나 습관적 거짓말의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가장 극단적인 것은 ‘공상허언증(pseudologia fantastica)’이다. 공상허언증은 자신을 과시하거나 관심받고자 하는 의도로 시작되나 스스로 만들어낸 말을 사실로 믿어버리기 때문에 거짓말 탐지기도 피해 간다. <<리플리>>(1999)라는 영화를 통해 알려진 “리플리 증후군” 혹은 “리플리 효과”는 자신의 현실을 부정하면서 허구 세계를 진실이라 믿고 그야말로 거짓말을 살아가면서 가상의 신분에서 행복감을 느끼기도 하는 병적 상태이다.

이 즈음에서 우리는 나 자신의 거짓말의 정도와 수준은 어느 정도인지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겠다. 심리학자인 폴 에크만에 따르면 인간은 사소한 거짓말에서부터 거대한 속임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거짓말을 평균적으로 8분에 한 번씩, 하루 약 200번 한다 하니, 하얀, 빨간, 무지개색, 회색, 까만 거짓말 어느 것에든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오히려 부지불식간에 “연습이 대가를 만든다(즉, 거짓말쟁이는 연습으로 완벽해진다)”는 명제를 실천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거짓말 후에 피노키오처럼 코가 길어지지는 않지만, 거짓말탐지기가 감지하는 각종 생리적 변화를 겪고, 코 주위와 내안검 부위 안륜근의 체온이 상승하는 ‘피노키오 효과’는 대개 경험한다. 일순간 ‘거짓말쟁이’가 되었던 보호자를 통해, 우리의 일상에 범람하는 수많은 진실과 거짓, ‘대안적 사실(alternative facts)’들을 분별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선의의 거짓말조차도 양심에 둔감해지는 뇌의 작용을 어느 정도는 일으킨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 하얗든 까맣든 거짓/진실을 말하였으면 하고 소고해 본다.

주사실의 아이나 그 보호자도 “위안이 되는 거짓말”과 “고통스러운 진실”을 알고 있었을까. 나를 편안히 어르는 거짓말과 가슴 아픈 진실, 아빠의 포근한 마음과 따가운 거짓말, 아이가 살아가면서 마주하게 될 수많은 진실과 거짓의 이야기들, 그 여러 색깔들을. 다시금 얼마간의 정적이 흐른다. 아이는 좀 전까지 있었던 비명의 스콜, 오열의 폭풍우를 이미 다 잊은 듯 밝은 얼굴로, 가느다란 팔에 수액 라인을 접붙이고 아빠와 재미난 놀이를 하는 중이다. 아빠가 거짓말쟁이든 아니든 이제 아무 상관없다는 듯이.

 

* 대한정신건강의학과 봉직의협회는 정신건강의학과 봉직의들로 구성된 비영리단체로, 일선 정신건강의학과 진료현장의 불합리한 제도를 개선하고 정신건강의학과 봉직의들의 권익과 처우를 증진시키며 이를 통해 환자의 치료받을 권리 보호와 정신 건강 향상을 목표로 하고 있다.

대한정신건강의학과 봉직의협회 홈페이지 (클릭)

 

* 참고자료

1. 고제원 (2008). 뇌지문을 이용한 거짓말 탐지. 법학연구, 29: 353-373.

2. Bryant, E. (2008). "Real lies, white lies, and gray lies: Towards a typology of deception." Kaleidoscope: A Graduate Journal of Qualitative Communication Research, 7: 23-48.

3. Emilio Gomez and Elvira Salazar Lopez (2017). “The Pinocchio effect and the Cold Stress Test: Lies and thermography.” Psychophysiology, Nov;54(11): 1621-1631.

4. Langleben, D. et al.(2002) "Brain activity during simulated deception: an event-related functional magnetic resonance study." Neuroimage 15: 727-732.

5. Paul Ekman (2009). Telling Lies: Clues to Deceit in the Marketplace, Politics, and Marriage. New York: Norton. 

6. Ronaldo Rengifo (2011). "The cognitive neuroscience of deception: advances in neuroscience, criminal law applications and ethics." Neurogenesis 11(1): 2-6.

 

저작권자 © 정신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