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신재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웹서핑을 하던 중, 이런 사진을 본 적이 있으신가요? 한 때 인터넷에서 유행했던 밈(meme) 입니다. 나의 어리석은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견공의 표정과,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라는 대사가 너무 어울리지 않나요? 

 

 

사람은 왜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되는 것일까

여기서 말하는 실수란, 핸드폰을 집에 놔두고 나오거나, 음식에 소금간을 빼 먹는 정도의 사소한 실수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삶을 살아가면서 같은 유형의 상처를 반복적으로 입으면서도, 같은 상황에 빠져드는 경우, 심지어는 옆에서 볼 때 자처해서 위험한 상황을 만들어내는 경우를 말합니다. 이를테면, 알코올 중독인 아버지의 밑에서 학대를 받으며 자란 여성이 비슷한 유형의 학대적인 남편을 선택하게 되는 경우나, 항상 갑을 관계에 가까운 연인을 만나오던 복종적인 남성이 또 자신에게 정서적으로 냉담하면서도,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여성을 애인으로 삼는 경우 등을 말합니다. 

주변 사람들은 참 안타까워합니다. 도대체 네가 어디가 부족해서, 왜 하필이면 그런 사람들만 만나게 되는지. 옆에서 아무리 타이르고, 설득해도 안타까운 내 맘 같지가 않지요. 대체 이런 일이 왜 생기게 되는 걸까요?

 

♦ 반복 강박(repetition compulsion) 혹은 스키마 굴복(schema surrender)

정신분석 이론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이러한 현상을 반복 강박(repetition compulsion)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성장 과정에서 트라우마를 입었던 이들이, 성장한 이후에도 비슷한 상황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것이지요. 후에 뇌과학을 비롯한 여러 이론이 밝혀지면서 수정되긴 했지만, 프로이트는 반복강박의 좀 더 근원적인 이유로 죽음의 충동, 혹은 원시적인 파괴의 충동이라는 이론들을 내세우기도 했습니다. 

또, 스키마 치료 이론에서는 이를 내부의 스키마에 대한 굴복(surrender)의 반응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틀이 정형화 되어 있는 상태에서, 스키마를 통해 들어온 정보를 그대로 받아들여, 서로 다른 외부의 자극을 다 같은 형태로 해석하는 것이지요. 이를테면, 버림받음(abandonment)의 스키마를 가진 이는 상대방이 하는 말, 행동, 표정 모두 자신에게 관심을 거두려 하고 있다고 해석합니다. 자신이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시각은, 어린 시절의 성장 과정에서 형성됩니다. 지속적이거나 안정적이지 못한, 위태롭고 두려웠던 관계의 경험들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결국에는 자신이 버림받을 것이며, 쓸쓸하게 혼자 남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을 불러일으킵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시각으로 타인을 바라볼 때 자신에게 안정적인 사랑을 줄 수 있는 이를 만나게 되어도 ‘지루한 사람’ 혹은 ‘매력이 없는 사람’으로 여기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역설적이게 자신의 감정을 자극하는 ‘바람둥이’ 혹은 ‘나쁜 남자’ 유형의 상대를 더 매력적으로 여기게 됩니다. 의식의 수면 밑에서는 과거의 고통스럽고 자기 파괴적인 경험을 재현하고 있지만, 이를 ‘사랑에 빠진 것’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 익숙하지 않다면, 감정에 불을 지피는 상대의 매력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알기가 힘듭니다.
 

사진_픽사베이


정신분석 이론과 스키마 치료 이론 어느 쪽이든, 반복적인 자기 파괴적인 행동의 근본적 원인은 학습된 익숙함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출생 이후 아이의 뇌는 그 기능이 폭발적으로 성장합니다. 처음에는 제한된 신체 기능과 인지 능력으로 인해 제 몸하나 돌보기도 힘든 상태에서, 걸음마를 떼고 삶의 반경이 넓어지고, 점차 성장하며 부모님을 비롯한 주변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수많은 정보들을 기억하고, 학습하고, 뇌의 해마(hippocampus)를 비롯한 여러 부위에 저장합니다. 이러한 주변 환경과의 상호작용은, 타고 난 유전적 기질과 맞물려 세상을 인식하는 틀(frame)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한 번 견고하게 자리 잡은 기억과 관점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다른 상황도 동일한 방향으로 해석해내고야 말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틀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가장 익숙하다는 것입니다. 익숙함은 편안함, 안전함, 안정감이라는 아이의 기본적인 욕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 되었든, 눈앞에 주어진 것을 다른 식으로 해석하는 일이 결코 쉽지는 않습니다. 이미 상황을 해석하는 방식이 자신의 뇌 안에 자리잡혀 있기 때문이지요. 이런 연유로 옳은 일이라도 익숙하지 못한 일이라면 두려움에 회피하게 만듭니다. 뇌세포 사이의 연결통로가 만들어지려면, 즉 익숙한 습관으로 이어지려면 꽤 많은 노력과 시간이 걸립니다.

학대받으며 자란 이는 가족들 간의 의사소통이 서로 공격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감정을 건강하게 표현하기보다는 행동화(acting-out)로 나타내는 것이 더 익숙합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감정표현은 희로애락(喜怒哀樂)중 노(怒)에만 국한됩니다. 학대하는 부모에게 있어, 자녀는 감정의 쓰레기통 역할을 담당할 뿐이죠.

참 안타깝지만, 이런 환경에서 자란 이가 가정을 꾸리게 될 때, 따뜻하고 화목한 가정을 이루기는 쉽지 않습니다. 의식적으로는 늘 경계하고 조심하려 하겠지만, 감정이 앞서는 순간에 마음의 수면 밑에 가라앉아 있던 과거의 학습된 기억들이 익숙한 상황을 재현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가장 닮고 싶지 않았던 학대하는 부모님의 모습을, 어느 순간 자신 안에서 발견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너무나 무관심하고, 방임적이었던, 그래서 정서적 박탈감(emotional deprivation)을 느끼게 만들었던 부모님에게 분노가 치밀었던 사람이, 결국 배우자를 선택하게 될 때 냉담하고 무관심한 상대를 선택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 또한 결과와 상관없는, 익숙한 상황의 무의식적인 선택으로 인한 것입니다. 생활 속에서 이런 반복되는 자기 파괴적인 선택의 예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 변화의 시작 : 자기 파괴적 패턴을 인식하기

끝날 듯 끝나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자기 파괴적인 패턴을 벗어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아니, 자신이 그런 반복적인 패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뭔가 답답하고, 이게 아닌 것 같으면서도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눈앞에 보이는 삶을 똑같이 반복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므로, 우선 자신의 패턴을 조금은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조금은 떨어져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변에서 나를 봐 왔던 지인들의 말을 흘려듣지 말고, 한 번 되짚어 생각해 봅시다. 들을 당시에는 기분 나빴던 말이고,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이야기겠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의 모습을 알 수 있는 힌트가 될 수 있습니다. 

또, 나와 감정적으로 깊게 얽혔던 이들과의 관계를 생각해 봅시다. 그들이 어떤 정형화된 모습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요? 과도하게 복종적이고, 눈치 보는 사람들은 아니었을까요? 아니면, 누가 봐도 무척 매력적이지만, 나를 정서적으로 착취하고, 힘들게 만들었던 ‘팜므파탈/옴므파탈’ 타입은 아니었나요? 나의 마음을 격렬하게 흔들어 놓았던 이들과 왜 하필 내가 감정적으로 얽히게 되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면, 나의 패턴을 알게 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동일한 패턴을 반복하고 있음을 인식하게 되는 순간, 변화의 첫걸음을 떼게 됩니다. 패턴을 인식할 수 있다면, 자기 파괴적인 양상과는 반대되는 건강한 대처로 바꾸어 나가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수십 년간의 습관과 이별하기 위해서 지난한 싸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객관적인 시각으로 방향을 바로 잡아줄 수 있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물론 그 이후에도 갈 길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만,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잡고 천천히 한 걸음씩 옮기게 된다면, 조금씩 변화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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