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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마음을 읽다] 중력, 또는 아직도 내 가슴속에 남아있는 당신의 온기
권순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 승인 2018.10.07 10:44

[정신의학신문 : 권순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중력, 또는 아직도 내 가슴속에 남아있는 당신의 온기
- 그래비티 Gravity, 2013

 

제작:에스페란토 필르모이, 헤이데이 필름/ 배급:워너 브라더스


♦ 공감, 우리가 영화를 보는 이유

왜 우리는 영화를 보는 걸까요? 어째서 우리는 스크린 속 두 시간에 펼쳐지는 한정된 인물들의 한정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의 이야기에 열광하는 것일까요? 여러 가지 답이 나올 수 있는 질문이지만, 개인적으로 저는 우리가 영화를 보는 이유를 공감(sympathy)에서 찾습니다. 

인간의 뇌에서 유난히 발달된 전두대피질(Anterior cingulate cortex) 덕분에 우리는 때때로 타인의 감정을 자신의 것처럼 느끼게 됩니다. 이는 인간 정신의 작용 중 가장 인간다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공감 덕분에 우리는 스크린 속 등장인물들의 삶의 절망과 환희를 마치 자신의 것처럼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내 것이 된 타인의 감정은 스크린 속의 간접 체험을 생생한 나의 일부로 바꿔갑니다. 

따라서 모든 영화는 등장인물들의 삶과 행동의 기록인 동시에 감독이 우리에게 보내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메시지가 생생할수록 영화는 생명력을 얻게 됩니다. 반대로, 메시지가 희미한 영화는 수많은 돈과 특수효과가 투입되더라도 오래 기억되지 못합니다. 오늘 소개드릴 영화 ‘그래비티’는 전자에 속하는 영화입니다.
 

영화 그래비티 中


영화 그래비티는 우주왕복선을 타고 허블 우주망원경을 수리하던 라이언 스톤 박사(산드라 블록)가 우주 쓰레기와의 충돌로 인해 우주 미아가 되고, 여러 고난을 거쳐 결국 지구로 귀환하게 된다는 매우 단순한 플롯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의 볼거리는 압도적입니다. 광활한 우주에서 표류하는 우주비행사의 모습은 현장감이 넘치며, 아무도 없는 거대한 공간에서 혼자가 되는 공포를 매우 생생하게 표현합니다. 그러나 영화는 우주의 광활함을 단순히 볼거리나 배경으로 소모하지 않고 모든 관계가 단절된 인간의 고독과 연결시킵니다. 

 

♦ 인간, 고독 속으로 내던져지다.

우주공간으로 튕겨져 나온 스톤 박사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우주공간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줄 누군가를 애타게 찾을 때, 우리는 우리 인생의 절대적 고독의 순간을 떠올리게 됩니다. 영원할 줄 알았던 자신의 사랑이 사실은 찰나의 감정의 화학작용에 불과했음을 깨달았을 때, 평생을 함께할 줄 알았던 가족의 죽음이라는 냉엄한 현실과 맞닥뜨렸을 때 조용하고 아름다워 보였던 우주는 순식간에 우리를 집어삼키는 심연이 됩니다. 결국 중력이 없는 우주공간은 모든 관계가 단절된 인간의 삶에 대한 은유이기도 합니다. 동료 우주비행사인 매트(조지 클루니)와의 대화에서 감독은 스톤 박사가 딸을 잃은 후에 자신의 인생에서도 내던져진 상태임을 드러냅니다.
 

“그래. 여기에 있어서 제일 좋은 게 뭐야?”
“조용한 거요. 곧 익숙해지겠지만요.”

 

“딸이 있었어요. 네 살이었어요.
학교에서 술래잡기를 하는데, 넘어져서 머리를 부딪혔어요.
그게 다예요. 바보같이... 

전화를 받았을 땐 운전 중이었어요.
그 이후로 그냥 그렇게 살아요.
일어나서 일하고, 운전하고...”

 


영화에서는 끈, 통신 등의 소품을 통해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것, 즉 관계를 표현합니다. 중력이 없는 우주공간을 통해서 중력의 존재를 드러내듯이, 관계가 단절된 스톤 박사의 삶의 일부를 보여줌으로써 인간에게 있어서 타인의 존재의 의미를 드러냅니다.
 

영화 그래비티 中


매트는 결국 스톤 박사를 살리기 위해 스스로 둘을 연결한 끈을 놓아버리게 되고, 끊임없는 수다로 스톤의 마음을 지지해주던 매트는 우주 너머로 사라집니다. 잠시나마 안식을 얻었던 스톤은 다시 완전한 고독을 견뎌내야 합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필연적으로 헤어짐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헤어짐은 지금까지 간신히 견뎌내어 왔던 처음의 고독에 그 이상의 고통을 더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스톤 박사가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우주로 올라오게 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 대화, 터무니없이 불완전한 인간의 통신

혼자가 된 스톤의 여정은 우주정거장에서의 잠깐의 휴식으로 이어집니다. 또 한 번의 상실을 경험한 그녀에게 우주정거장 또한 안식처는 아닙니다. 필사적으로 통신을 시도하는 스톤에게 들려온 것은 구원의 목소리가 아닌,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말하는 누군가의 목소리였습니다. 
 

“아닌강, 강아지 소리 좀 들려주실래요?
오... 난 죽을 거예요. 나도 알아요. 
누구나 죽는다는 건. 누구나 알죠.
그치만 난 오늘 죽을 거예요. 

근데 이거 알아요?

저 아직도 무서워요. 진짜 무서워요.
아무도 날 위해 슬퍼하지 않을 거예요. 
날 위해 기도도 안 해줄 거예요.
날 위해 슬퍼해줄래요?”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스톤 박사와 아닌강의 통신은 사람과 사람의 불완전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우리의 언어는, 우리의 모든 생각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는 걸까요? 그리고 우리의 언어를 들은 상대방의 마음속에는 우리의 모든 생각과 심상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을까요? 

어떤 정신분석가들은 사람은 타인의 실체 그 자체가 아닌 자신의 마음에 비친 타인의 모습을 담아 그 표상과 상호작용할 뿐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표상과 실체의 간격은 영화 속의 아득한 우주공간만큼이나 떨어져 있지요. 그래서 우리는 곁에 누군가가 있어도 고독할 때가 많습니다. 내 마음속의 타인과 실제 그 사람의 모습이 얼마나 같을지, 우리가 그 사람을 이해했는지 아니면 단지 이해한 것으로 상상하고 있을 뿐인지 우리는 영원히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그 사람이 나를 떠나갈 때, 내 안에 담긴 그 사람의 일부가 사라집니다. 동시에 나는 나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고통을 겪게 됩니다. 

타인과의 만남이 고독의 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타인과의 만남은 언젠가 겪게 될 아픔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 상실 속에서 사람은 재생한다. 그래서 나의 착륙은 언제나 또 다른 발사였다.

우주정거장의 유일한 착륙선인 소유즈를 이용해 중국 우주정거장 텐궁을 향해 발진을 시도하지만, 연료가 떨어진 상황, 스톤 박사는 모든 생존의 가능성을 접습니다. 타인과의 만남이 타인의 모습을 받아들여 나의 일부로 삼는 것이라면, 더 이상 타인과 만날 수 없게 된 삶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그녀는 결코 닿지 않을 아이의 울음소리, 강아지 울음소리, 자장가 소리를 들으며 자살을 결심합니다. 그러나 그 순간, 스톤은 우주 공간 속으로 사라진 매트의 환영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매트의 환영은 삶을 포기한 스톤 박사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살 것을 역설합니다.
 

매트 : 연착륙 제트엔진은 시도해봤나?
스톤 : 그건 착륙용이잖아요.
매트 : 착륙이나 발사나 둘 다 시스템은 같아.
스톤 : 매번 추락했다고요.
매트 : 그럼, 지구로 돌아갈 거야, 아님 여기서 계속 살 거야?
  여기 멋진 건 나도 알아. 여기선 자넬 해칠 사람도 아무도 없어.
  안전하지. 내 말은... 왜 사는 거야? 아니, 산다는 게 뭐지? 
  가기로 결정했으면 계속 가야 해. 등 뒤에 붙이고 가는 거야.
  땅에 두발로 딱 버티고 서서 살아가는 거야. 이봐 라이언?
스톤 : 네?
매트 : 집에 갈 시간이야.
스톤 : 착륙은... 발사다.

 

애도(mourning)와 우울(melancholia)은 대상의 상실로 인해 발생하는 서로 다른 결과입니다. 상실을 견뎌내는 힘이 약한 경우, 받아들인 대상은 여전히 외적 대상으로만 남아있게 됩니다. 따라서 대상과 이별하게 되면 내면의 자신이 버림받은 느낌을 받게 되어 고통스러워합니다. 반면, 이별을 충분히 견뎌내는 경우에는 애도 반응을 거쳐 대상이 곧 자신의 일부가 됩니다. 그 사람과 이별해도 그 사람의 특성과 의미를 생활 속에서 받아들여 살게 됩니다. 대상과의 좋은 관계와 가슴속에 남아있는 타인과의 추억은, 자신에게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잃어버린 자신을 회복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게 합니다. 한 사람과의 만남과 사랑을 통해서, 다음 사람과의 사랑이 잉태됩니다.

서로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던, 지난날 우리들의 대화는 우리의 인생에서 아무런 의미를 만들지 못했던 것일까요? 서로 손이 닿지 않는 건너편에서 서로를 부르는 두 사람의 목소리는 비록 뜻은 통하지 않지만, 저 건너편에 나와 똑같은 누군가가 있다고 느끼게 하고, 그럼으로써 삶의 온기를 느끼게 하고 그 안에서 인간의 생의 의지는 다시 타오릅니다. 

이름 모를 누군가와의 뜻도 통하지 않는 대화, 아이 울음소리, 자장가, 강아지 소리, 먼 곳 어디선가에서 분명히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인간의 온기는 식어버린 스톤의 가슴에 불을 붙이고, 여전히 가슴속에 남아있는 매트를 불러옵니다. 그리고 매트는 '착륙용 로켓'으로 '멈춰버린 우주선을 발사'시키자고 합니다. 주저하는 스톤에게 가슴속의 매트는 강변합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착륙은 언제나 또 다른 발사라는 것을 말이죠. 타인과의 만남으로 인한 아팠던 그 모든 순간이 사실은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게 해주는 삶의 온기였다는 것을 말입니다.
 

영화 그래비티 中


천신만고 끝에 다다른 중국의 우주정거장 텐궁에서 이제 스톤은 위험을 무릅쓰고 지구로 돌아가기로 합니다. 아닌강과의 통신을 통해, 매트와의 대화를 통해,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무의 세계를 거쳐 오면서 그녀는 앞으로의 인생에서 자신이 이제까지 잃어왔던 것을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매트의 말대로 ‘땅에 두 발을 딱 붙이고’ 살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녀가 도달하게 될 중력의 세계에서는 이제껏 그녀가 외면해왔던 수많은 만남과 상실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중력은 우리를 지탱해주지만, 우리는 이 중력 때문에 자유롭지 못하고, 짓눌리기도 하고, 때로는 마음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녀의 마음속에 망설임은 없어 보입니다. 착륙은 언제나 또 다른 발사였다는 것을, 그녀는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왜 영화를 보는 걸까요? 왜 우리는 화면 속에서 펼쳐지는 타인들의 이야기에 울고 웃는 걸까요? 어째서 우리는 상처받을 줄 알면서도, 완전히 이해받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타인과의 관계를 갈망하게 되는 것일까요? 그리고 상대방의 마음에 결코 닿을 일 없는 통신을 끊임없이 시도하는 것일까요? 어쩌면 우리가 마음속에 담게 되는 타인의 존재 하나하나가 우리 마음속에 온기 하나를 더하게 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온기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확인하고 살아갑니다.

 

“이제 내가 보기에 결과는 둘 중 하나다.
멋진 여행을 다녀왔다고 자랑하든지, 
아니면 10분 안에 불타 죽든지.
어찌 됐든, 밑져야 본전이니까.
어느 쪽이든 엄청난 여행이 될 테니까.
난 준비됐어.”

 


권순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wanderag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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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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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푸른나무 2018-10-13 11:13:05

    좋은 글 감사합니다 :D   삭제

    • 박혜정 2018-10-08 10:49:45

      글 잘 읽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란 말이 생각나네요. 저도 그래비티를 보며 여러 은유적 의미들을 생각했었는데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연대를 느낍니다. 제 안의 여러 모습이 여전히 두 발을 땅에 붙이고 살고 싶도록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걸 확인하고 가요.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써 주세요!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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