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총선. 라캉과 오이디푸스

[정신의학신문 : 온안 정신건강의학과의원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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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총선. 라캉과 오이디푸스>

선거철이다. 길거리며 핸드폰이며 인터넷이며 할 것 없이 후보자들의 유세와 홍보가 넘쳐난다. 사무실에 앉아 있어도 창문을 타고 메가폰의 선거송이 울려 퍼진다. 선거철만큼이나 원치 않는 광고가 일상을 파고 들어오는 때가 있던가. 막상 정치에 대한 신념이나 공약에 대한 이야기는 한참을 뒤져봐야 나올 법한 곳에 숨겨둔 채 그저 기호와 이름만을 소리 높여 광고 씨엠송처럼 사람들의 머릿속에 주입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민주주의의 근간이자 핵심이라 한다면야 두말할 것 없이 선거일 테지만, 선거의 물결이 흘러 넘치는 4월의 거리는 어쩐지 끊임 없는 욕망의 일렁임만을 보여주고만 있는 듯 하다. 그 물결의 일렁임은 아찔한 현기증을 유발하고, 어지러움은 유권자로 하여금 후보자들이 숨겨둔 정치 신념의 정체로부터 한걸음 더 물러서게 만든다. 결국 갈 곳 잃은 표들은 그 욕망의 거센 물결에 휩쓸려 더 큰 욕망의 소용돌이를 재생산한다.

 

라캉은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라고 했다. 정신과 의사이자 철학자인 라캉은 ‘욕망의 이론가’라고도 불린다. 그가 평생을 바쳐 파헤친 욕망의 구조와 작동 방식에서 발견한 것은, 인간의 충동(리비도)이 추구하는 실재계의 대상이 결국은 상징계를 지배하는 타자의 질서에 복종할 수 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었다. 언뜻 쉽게 이해가 가지는 않는 말이다. 우선, 인간의 욕망이라는 거창한 주제에 대해 라캉의 말을 빌려 설명하며 다소 어려운 용어들이 난무하게 되기에 앞서 라캉이 주장한 바의 간단한 골격에 대해 먼저 살펴보자.

라캉은 주체가 세상과 관계를 맺는 세계를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로 나누었다. 인간의 기본적인 충동-순수한 본능적 에너지인 리비도(Libido)는 상상계에서 분리되며 그 본능적인 방향성에 따라 실재계를 향해 나아가게 된다. 그러나 실재계를 향한 리비도의 그 여정은 상징계의 질서에 가로막혀 정처 없이 떠돌게만 되고, 바로 이것이 인간 욕망의 구조라고 라캉은 생각한 것이다. 여기서 욕망을 규정짓게 되는 상징계-타자(autre)는 대표적으로 언어를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언어는 대상의 의미인 ‘시니피에’와 그 의미를 가리키는 기호적 표시인 ‘시니피앙’으로 구성된다. 어려운 말 같지만 간단히 이야기해 ‘의자’라고 하면 그것이 지칭하는 ‘앉을 수 있는 도구’를 뜻하는 ‘시니피에’와 ㅇ+ㅢ+ㅈ+ㅏ로 이루어진 기호인 ‘시니피앙’으로 언어의 체계가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시니피앙의 질서는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우리가 언어적 질서에 들어서기 전부터 이미 구성되어 있던 체계이다. 우리 의식 체계와 독립된 별개의 ‘타자’이다. 그리고 우리는 언어를 벗어나서는 사유하지 못하게 되는 만큼 타자의 질서에 복종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타자의 질서(시니피앙의 질서)는 충동이 찾아 헤매는 진정한 대상(대상a-시니피에)를 완벽하게 재현할 수 없는 본질적으로 불완전한 질서이다. 시니피앙은 본질적으로 결여된 체계이다. 가로막힌 결여된 타자의 세계를 정처없이 떠돌며 인간은 ‘욕망’하게 된다.

 

그렇다면 벗어날 수 없는 결여의 세계, 타자의 세계에서 ‘주체’는 과연 어디에 자리 잡게 되는 것일까. 흥미롭게도 라캉은 타자라는 기표를 내세운 상징계에서의 욕망에 대해 설명하며, 욕망의 주체가 확립되는 과정을 이야기하기 위해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그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재해석 했다.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아이는 어머니에 대해 성적 욕망을 품게 되지만, 그 욕망은 자신보다 훨씬 강력한 존재인 부친에 의해 가로막히게 된다. 아이는 아버지가 자신의 남근(phallus)를 거세해 버릴지 모른다는 거세불안에 휩싸이게 되고, 그 불안에서 벗어나고자 아버지처럼 강인하고 큰 존재가 되기 위해 아버지를 ‘동일시’하게 된다. 권위의 대상과의 동일시를 통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게 되는 것이다.

라캉은 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의 아버지-어머니-아이의 삼자구조를 차용해오며 그 실제적 관계를 고도로 추상화했다. 라캉의 이론에서 남근(phallus)은 단순히 음경(penis)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며 충동과 욕망의 기표로서 존재한다. ‘아버지’ 또한 현실에 존재하는 어떤 인물이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nom du pere)라 표현된 기표로 역할한다. 그의 주장에서 아이는 상징계로 들어오기 이전, 상상계에 존재하며 ‘거울단계’ 자아 인식을 한다. 거울처럼 반영된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동일시하며 왜곡된 환상적 자아인식을 한다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아이는 ‘어머니와 나’ 둘 뿐인 이자적 관계(binary relationship)에 몰입해있다. 그러면서 어머니가 욕망하는 대상-남근(phallus)로 상징화된 그 대상에 거울단계 자아 인식을 통해 ‘어머니가 욕망하는 대상이 되고 싶다’ - ‘남근이 되고 싶다’는 욕망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어머니와 나 사이의 융합된 욕망은 곧 ‘아버지의 이름’에 의해 가로막히고 저지 당하게 된다. 아버지에 의해 어머니의 욕망의 부재를 경험하고, 아이는 어머니가 욕망하는 것이 사실은 내가 아니라 아버지의 남근임을 깨닫게 된다. 그러면서 남근은 아이에게 어머니 욕망의 시니피앙이 된다. 아이는 어머니 욕망의 결여를 깨닫고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아이는 주체를 확립하고 ‘남근이 되고 싶다’는 욕망에서 ‘남근을 가지고 싶다’는 욕망으로 나아가게 된다. 타자의 욕망에서 결여를 맞닥뜨리고 상징계로 진입하게 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해소의 그 순간에 바로 주체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주체가 상징계에 들어서며 인식했던 첫 번째 시니피앙인 남근(phallus)은, 그 자체가 다시 시니피에가 되어 ‘아버지’라는 시니피앙을 만들어낸다. 그러면서 태초 ‘어머니의 욕망-타자의 욕망’이었던 남근은 최초의 무의식으로 억압되어 버린다.

다소 어려운 개념이지만 정리하자면, 결국 우리들 최초 욕망의 시니피앙은 타자의 욕망이며 타자의 욕망이 본질적으로 가지는 결여에서 타자와의 분리를 통해 주체와 무의식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국회의원 총선거의 철. 거리마다 온갖 기표의 욕망이 뒤섞인 채 산재된 욕망이 넘실거린다. 시도 때도 없이 확성기로 귀를 찌르는 저 욕망의 굴레는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어 맺음 되는 것일지, 라캉의 눈을 빌어 되짚어보자.

민생 안정이나 사회 개혁의 철학은 뒷전에 숨겨둔 채 선거에만 목매는 후보자들의 욕망은 국회의원이라는 직함의 권력과 명예, 돈을 향해 꿈틀거린다. 금뱃지 하나만 달면 권력과 안락함이 넘쳐 흐를 것이라는 탐욕스러운 욕망은, 선거를 앞두고 시민들의 ‘표’를 욕망한다. 표는 유권자-국민들의 욕망이고, 우리들의 욕망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욕망 역시 라캉의 상징계 안에 얽매여 있을진대, 타자의 욕망으로 얼기설기 짜여진 시니피앙의 매트릭스를 욕망한다. 우리는 타자의 욕망-사회의 욕망을 욕망한다.

돈이 사람을 죽이고, 권력이 철학과 영혼을 압도하는 물신주의 금본주의가 만연해가는 현대인과 현대 사회의 존재의 역능은 다름 아닌 돈과 명예, 권력이다. 돈과 권력은 현대인의 남근(Phallus)이다. 명예와 부는 현대인의 남근이 되어 우리들을 끝없는 욕망의 굴레로 끌어들인다. 국회의원 선거의 단상에 올라선 후보자들 역시 그 거대한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며 저 거리의 욕망의 소용돌이의 꼬리를 문다.

 

물론 민주주의의 꽃이자 핵심이자 축제인 선거에, 바른 정신과 올곧은 철학를 향해 정진하는 깨어있는 영혼들이 없을리야 만무할 것이다. 그러나 연일 뉴스에 오르내리는 이전구투와, 그저 맹목으로 기호만을 외쳐대는 아우성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부와 명예만이 남근의 기표가 되어 버린 사회의 욕망 안에서 허우적대느라, 우리들 주체의 본질마저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불안해진다.

라캉이 이야기했듯 타자의 질서는 본질적으로 결여되어있다. 메울 수 없는 결여를 발견해야만, 그 소외를 통해, 타자와의 분리를 통해 주체는 오롯이 홀로 설 수 있다. 끊임없는 욕망의 쳇바퀴 속에서 과연 ‘나’는 어디에 있는가. 못내 씁쓸함이 가실 줄 모르는 요란스러운 선거판에서, 한층 더 성숙한 의식으로 나아가기 위한 오이디푸스의 고뇌를 되짚어 봐야할 때이다.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온안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전공의
한양대학교병원 외래교수
저서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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