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별적 존재가 되기 위한 몸부림
칸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 아카데미 영화제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한 <사울의 아들>은 존더코만도로 살아야 했던 사울에 대한 이야기이다. '존더코만도(Sonderkommando)'는 특수부대라는 뜻으로, 홀로코스트(유태인 대학살) 당시 동족이 학살되는 과정에 참여하고 시체를 처리해야 했던 유태인 수감자들을 지칭한다. 이들 역시 학살의 증언자가 될 우려로 인해 수개월 뒤 처형당하곤 했다.
샤워를 명분으로 탈의 후 가스실에 갇힌 수감자들이 고통 속에 철문을 부서져라 두드리면, 존더코만도들은 행여나 실수로 문이 열리지 않도록 바깥에서 몸으로 막아야 했고, 살해 절차가 끝난 뒤에는 수감자들이 벗어놓은 옷가지에서 귀중품을 건져내야 했으며, 나체의 시신을 수레에 산더미처럼 쌓아 소각장으로 나른 뒤 다음 희생자들이 도착하기 전까지 피로 얼룩진 가스실 바닥을 신속하게 물청소해야 했다. 이 일련의 과정들은 매일 같이 반복되었으며, 감정의 동요나 대화는 금지되었다.
‘개별성’이 말살되는 과정
보편적인 공감능력을 가졌다면 홀로코스트 같은 대량학살에 대한 이야기를 접할 때 물론 괴로움을 느낄 텐데, 희생자들이 당했을 끔찍한 고통에 대한 감정이입만으로는 그 괴로움의 원천을 다 설명할 수 없다. 우리가 불편하고 힘든 또 다른 이유는 바로 `개별성(individuation)의 말살'을 지켜보아야 하기 때문이며, <사울의 아들>에서도 그것이 잘 드러나 있다.
독일군들은 가스실에서 죽은 희생자들을 `토막' 이라고 부른다(이렇게 부르라는 규칙이 당시에 실제로 존재했다고 한다). 그 순간 그들은 사람이 아닌 토막이 된다. 또한 그들이 남긴 옷가지에서 귀중품을 제외한 물건들, 이를테면 한 때 행복했던 순간을 담은 가족사진, 작곡 중이던 악보, 일기, 신분증 따위의 것들은 아무렇게나 한데 모아져 불태워진다. 각자의 사연과 정체성이 묻어있던, 무척이나 개별적인 존재이던 물건들은 그 순간 `가연성 쓰레기'라는 하나의 공통점만으로 묶여진다.
개별성의 제거는 사울의 시선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러닝타임 내내 사울(게자 뢰리히)이라는 일인칭 시점에서 주변을 관찰하는 방식으로 카메라가 움직이는 가운데 시체 더미들은 얕은 초점으로 흐릿하게만 보여 진다. 감독(라즐로 네메스)은 잔인한 광경을 단지 역사적 사실이라는 이유만으로 지나치게 날것으로 재현할 때 발생 가능한 윤리적 문제를 고민한 결과 이런 방식을 택했다고 하는데(영화 내내 음악이 없는 것 역시 불필요한 감정 과잉이나 낭만화를 방지하기 위함이다), 이는 사울이 처해있던 심리적 현실(psychic reality)에서 유태인 희생자들이 어떻게 보였을 지를 나타내는 역할도 한다. 사울이 처음 존더코만도 일을 시작했을 때는 시신 하나하나가 사울에게 대단히 ‘구체적으로’ 다가왔을지 모르나, 시신 처리 작업이 반복될수록 그에게는 당장 자신이 청소해야 하는 가스실 바닥 따위만 선명하게 다가올 뿐, 개별 시신들에는 점차 무감각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무감각함은 사울이 비극의 한가운데에서 정신적으로 완전히 무너지지 않고 생존할 수 있게끔 하는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로서 작용한다. 이성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눈앞의 참혹함으로부터 자동적으로 심리적 거리를 둠으로써 스스로를 격리(isolation)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표정은 슬프다기 보다는 멍해 보이는데, 다른 존더코만도 동료들의 표정 역시 사울과 비슷하다. 서로 구별되지 않는 표정 속에서 사울의 개별성 역시 상실된다.
사울이 처한 위협들
영화에서 사울은 여러 가지 위협에 처해 있다. 위협(threat)이란 자신에게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사건의 발생이 ‘임박’했음을 자각한 상태를 말하며, 이는 나쁜 결과가 이미 일어나버린 피해(harm)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사울은 매일매일 한 순간도 빠짐없이 자신이 죽을지 모른다는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 그것은 늘 그의 턱밑에서 대기 중이다.
사람을 가장 극심한 스트레스 상태에 몰아넣을 수 있는 위협의 특성 중 두 가지는 예측 불가능성(unpredictability)과 통제 불가능성(uncontrollability)이며, 사울이 처한 상황 역시 그러하다. 예측 불가능하다는 것은 위협의 시기, 강도, 방법 등을 당사자가 짐작할 수 없다는 뜻이며, 통제 불가능하다는 것은 스스로가 뭘 어떻게 한다고 해서 그 위협을 피하거나 최소화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어느 때고 자신을 파리처럼 죽일 수 있는 사람들 앞에서 사소한 대화나 행동이 빌미가 되어 목숨을 잃을 수 있는데다가, 자신이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그들의 기분이 별로면 실수를 안 해도 언제든 죽을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이러한 고강도의 지속적인 스트레스로 인해 사울은 만성화된 불안에 놓여 있다.
사울이 처해있는 또 다른 위협은, 자신이 동족의 죽음을 거들고 있다는 죄책감, 눈앞의 죽음을 막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감이다. 사울은 앞서 언급한 격리의 방어기제 덕분에 정신적 무너짐을 유예하며 버텨 나가지만, 이러한 방어기제는 어디까지나 임시적인 진통제의 역할 만을 할 뿐이다. 모르는 사이에 죄책감은 차곡차곡 쌓여간다.
사울이 개별성을 획득하는 과정
여기까지가 영화의 도입부다. 진짜 사건은 아직 시작하지 않았다. 진짜 사건은, 한 차례 가스실 ‘샤워’가 끝나고 여느 때처럼 시신을 치우던 사울의 시야에 선명한 주검 하나가 들어오면서 비로소 시작된다. 수 백 구의 흐릿한 시신들 가운데 또렷하게 상이 맺혀지는 단 하나의 시신. 사울로서는 이 주검-자신의 아들-을 도저히 그냥 소각시킬 수가 없다. 수감자들 중에서 어떻게든 랍비를 찾은 다음, 랍비의 기도 아래 제대로 된 곳에 땅을 파고 묻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사울은 예측 불가능하고 통제 불가능한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며 자신의 목표를 위해 온갖 위험천만한 행동들을 한다. 이것은 때로는 여러 타인의 목숨까지도 곤경에 처하게 만드는데, 그것은 사울에게 아무래도 상관없어 보인다. 이쯤 되면 이것을 어떤 정의로운 의미로서의 ‘신념’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가족에 대한 맹목적 애착이라는 해석으로도 다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생존을 제 1원칙으로 생각한다면 도저히 할 수 없을 일들을 하는 그의 행위는 분명히 강박이며 ‘집착’이다. 그런데, 이 집착이 바로 사울을 다른 수감자들, 다른 존더코만도들, 그리고 다른 시신(‘토막’)들과 가장 뚜렷하게 구별되는 존재로 만들어준다. 이 집착은 단순한 집착이 아니라, 타인과 구별되는 개별적인 존재, 자기 자신으로 남기 위한 몸부림이다.
또한 이런 행위는 그동안 한계치까지 누적되었던 그의 죄책감과 무력감을 해소하는 역할을 해주기도 한다. 사울이라는 개별 존재가 만들어낸 고도의 정신적인 작용이다. 자신의 죽음을 무릅쓰면서, 대단히 의례적(ritualistic)이고 상징적이며 (누군가의 눈에는) 소모적인 행동을 한다는 사실 자체, 그리고 이것만큼은 사울 스스로가 철저히 선택하고 통제하는 행동이라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이 경우 의미는 행위의 결과가 아닌 동기에서 발생한다.
그래서, 흡사 퀘스트처럼 보이는 ‘눈앞의 시신을 랍비의 기도 아래 땅에 온전히 묻어주기‘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집중해서 보다보면 어느 순간 그 목표가 마치 어떤 허울처럼 느껴진다. 그에게 중요한 순간은, 똑같아 보이는 시신 더미에서 아들의 이름이 부여된 시신 하나를 발견한 바로 그 순간, 그리고 그 시신을 다른 ’토막‘들과 함께 소멸시키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를 하는 지금 이 순간이다. 그것이 죽음의 수용소에서 사울을, 그와 똑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타인들과 구별 지어주는 순간이며, 그를 위협하던 모든 것들-죽음, 죄책감, 무력감 같은 것들-을 일거에 날려버리는 순간이다. <사울의 아들>은, 확실히 사울에 대한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