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포의 자기 보호(자가포식작용) 유도해 강한 저항력 키운다

간헐적 단식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여성들 사이에 다이어트에 대한 요구가 높은 것에 반해 그들이 주로 선택하는 1일 1식류의 살인적인, 극단의 방법들이 실행하기에 만만치 않은데다 다이어트 효과를 상회하는 정도의 부작용 또한 심심치 않게 경험하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간헐적 단식은 방법에 따라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실행으로 옮기기가 비교적 쉽다는 이점이 있다.

가장 많이 선택되는 일주일 단위 방식을 예로 들면, 평소대로 식사를 하다가 일주일에 한 번 또는 두 번을 16시간 또는 24 시간 동안 섭취를 중단함으로써 일주일에 한 두 번의 끼니만을 거르면 되는 셈이니까.

하지만 살을 빼는 도구로서의 장점 너머에도 무언가가 있을 것인지 또는 간헐적 단식 습관이 우리 몸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과학적으로 검증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단언컨대, 관련 연구들은 분명 아직 초기 단계일 뿐 단지 현재 진행형일 것이다.

간헐적 단식 관련 연구의 대가도 아닌 필자가 어찌 단언하느냐고?

첫째, 연구의 재료는 약물 등이 아닌 무형의 ‘습관’일 터라 결과의 수치화가 주관적일 가능성이 높으며, 둘째, 연구의 검체는 다름 아닌 지구 최고의 복잡물인 인체여서 조절해야 할 변인이 수두룩할 것이며, 셋째, 무엇보다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대적인 지식이란 거의 없다는 것은 자연 연구자들 사이에 불문율이기 때문이리라.

다만 필자는 신경세포를 굶겨본(?) 경험을 바탕으로 또 논문을 끄적거려 본 경험을 바탕으로 과학 반, 사색 반의 견해를 짧게 적어 보고자 한다.

 

우리 인간이 삼시 세끼를-물론 지구의 도처에는 아직도 삼시 세끼를 못 챙겨서 먹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전부 챙겨먹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일까?

우리나라의 경우 보릿고개라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한국 전쟁 이후의 근현대부터가 아니었을까?

이 글을 읽고 있는 혹자가 우리 집안은 대대로 ‘뿌리 있는’ 집안이라 조선시대에도 보릿고개와는 상관없이 살았다고 반문한다 해도, 대세에 지장은 없다.

인류 비스무레한 조상이 두발로 직립보행을 시작한 것을 인류의 시작이라 본다면 자그마치 350만년 전이니, 조선시대가 아니라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대단한 집안이 있다 해도 상관없다.

 

최초의 동굴 벽화를 그리던 3만년 전의 원시인은 점심 식사는 했던 상황이었을까?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왜냐하면 농경생활과 음식의 저장 기술의 발달이 이뤄지기 전까지는 적어도 식생활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임기응변 그 자체였을 것이니까.

운과 날씨가 좋은 날엔 잡아놓은 맷돼지와 채집한 열매로 배불리 먹었겠지만, 운이 없고 추운 겨울엔 아마도 끼니를 거르기를 밥먹듯 했으리라.

신석기, 청동기, 철기 시대를 지나오면서 상황은 조금씩 나아졌겠지만 자연에 대한 절대적인 의존성은 현대에 비할 바 아니어서, 자연이 공급해주는대로 배불리 먹으라면 먹고, 굶으라면 굶는 식이었을 것이다.

요컨대, 인류가 삼시 세끼를 챙겨먹기 시작한 풍족한 역사는, 간헐적 단식-비록 자연에 의한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 하지만-으로 점철된 배고픔의 역사에 비하면 새발의 피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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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우리 몸을 구성하는 가장 작은 생명의 단위인 세포(Cell), 그 속에는 모든 세포 활동을 조절하는 핵(Neucleus)이 존재한다.

핵은 세포를 구성하는 모든 단백질을 필요 시 만들어 낼 수 있는 설계도인 유전자(gene)를 저장하고 있다.

중요한 사실은 인류의 역사를 통해 유전자 또한 진화를 거듭해왔다는 사실이다.

어떤 단백질이 불필요하면 도태시키고, 또 다른 단백질은 삶을 영위함에 있어 필수적이면 그 활성을 촉진하는 방식으로 인류의 모습에 최적화되기 위하여 유전자와 세포는 나름 최선의 노력을 해온 터이다.

만약 수백만년 동안 지속되어 온 인류의 생활 습관이 있다면, 그러한 모습에 최적화된 형태로 세포는 적응되어 있으며, 이러한 우리의 세포를 양으로든 음으로든 벗어난 환경에 노출시키면 건강한 활동을 할 수 없게 될 것임은 분명하다.

 

이러한 논리로 현대인의 식습관을 생각해보자.

일부러 굶는다는 것은 비정상처럼 여겨지는 현대를 살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인 요소들로 인하여 생긴 현대인들의 생각이 그렇다는 것이다.

위에 설명한 풍족함의 역사보다 배고픔의 역사가 수백 배는 길었음을 상기할 때, 세포와 그 집합체인 우리 몸에게는 일정 기간 굶는다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을 수 있다.

오히려, 풍족을 넘어 과잉된 영양은 세포 활동을 방해할 수 있으며, 반대로 버틸만한 만큼의 영양 공급 중단 -그렇다고 그 자체로 영양 결핍이랄 수는 없지만-은 건강한 세포 활동을 부추길 수 있다는 것이 유독 필자의 주장만이 아닌 학계의 중론이다.

예를 들어볼까?

암세포는 정상적인 세포의 분열, 성장, 죽음으로 이어지는 주기가 고장 나서 죽지는 않고 분열과 성장만 거듭하는 세포를 말한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암세포는 영양 부족에 의해서보다 영양 과잉에 의하여 훨씬 많이 발생된다는 사실이다.

 

반대로 영양 공급의 중단으로 세포가 건강해지는 예가 최근 들어 학계에 다수 발표되고 있다.

그 중 하나의 기작으로서 자가포식작용(autophagy)을 들 수 있는데, 이는 세포가 에너지가 부족해지면 발동하는 자기 보호 현상의 하나로, 세포 안의 노폐물이나 기능을 못 하는 소기관들을 자가용해소체에 함입시켜 분해시키는 작용을 말한다.

이 때, 상당량의 에너지를 얻게 되는데, 이를 통해 세포로 하여금 베스트 컨디션을 유지시킨다.

기업 구조에 대입하면 구조조정을 담당하는 질 관리(quality imrovement; QI) 팀이라고나 할까?

세포에게 죽지 않을 만큼의 영양 공급 중단을 한 경우, 다음 번에 충분히 죽을 만큼의 악조건을 주었을 때, 훨씬 강한 저항력을 갖게 되는 이유로 많은 학자들은 이 현상, 즉 자가포식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어떤가?

풍요 속에서 빈곤을 유지하는 것이 오히려 용기인 현대인들에게, 일주일에 한두 끼의 ‘주체적인’ 굶어보기는 충분히 시도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적어도 세포에게는 나쁜 영향을 주기는 커녕, 여러모로 세포를 적당히 긴장시키는 역할을 할 테니까.

단, 간헐적 단식 중에서도 혹독한 유형의 방식은 추천하지 않는다.

위에 설명한 바대로, 세포가 ‘죽지 않을 만큼’이어야 자가포식작용을 유도해서 긴장도 시키는 것이지, 긴장할 주체가 죽어버리면 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

 

환자를 주로 보는 임상의학 의사들은 가끔 당연한 조언을 한다.

“담배를 끊으면 당신도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글을 마치며, 세포를 주로 보는 기초의학 의사로서 수줍은 조언을 하나 하자.

“세포를 건강하게 하면 우리몸도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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