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허지원 고려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사는 게 실제로 녹록지 않는 것이 맞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 중 열에 한두 개 정도만 우리가 간절히 바랐던 것이고 나머지 여덟 아홉 개는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그냥 일어나 버리는' 일들입니다. 

일반 인구의 스트레스 수준이 실제로 점차 증가하고 있다는 연구결과들도 있고요.

 

사는 것을 더 힘들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는 우리의 의존성과 자존심 때문입니다. 

마음을 아무리 비우려고 해도, 타인과의 관계에 몰두하며 '나 아니면 안 돼!' 하는 생각으로 과잉한 행동을 하기도 하고, 특히 여러 실패와 좌절을 맞닥뜨렸을 때 본인의 가치를 입증해야 한다면서 다른 사람에게 '질척거리기' 시작합니다.

 

발생한 문제를 인식하고 때로는 자기 행동에 책임을 온전히 지고 스스로 기꺼이 외로워져야 할 때조차, 많은 사람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과 타인을 기만하기 시작합니다. 

비난할 대상이 되었건 구원자가 되었건, 방패 삼을 타인을 찾기 시작하죠. 

당면한 문제를 직면하기보다는 모면하려 하면서 결국 장기적으로 외부환경에의 의존성은 높아지고 자존감은 낮아집니다. 

다른 사람이 없이는 모든 것이 곤란합니다. 

이래서는 혼자 자유롭게 즐겁기 어렵습니다.

 

사진_픽셀

 

이런 행동 패턴이 아무 맥락 없이 시작되지는 않습니다. 

오랜 시간의 거절, 비난, 무시의 경험들로 부정적인 자기개념들이 우리의 장기 기억에 차곡차곡 저장되다 보면, 다행스럽게 타고난 지적 자원(우수한 지능) 혹은 우연한 환경적 자원들(좋은 사람들)로 제 밥벌이 꽤나 하며 그나마 잘 버티고 있다 할지라도 운 나쁘게 닥친 갑작스러운 문제 상황에 마음은 금세 와들와들, 걷잡을 수 없이 불안해집니다. 

'잘 포장하며 살아왔는데, 이 문제까지 나의 문제로 만들고 싶지 않다.' 

자기 이미지에 위협이 되는 이 부정적인 사건과 애매한 상황은 이제 좀처럼 용납하기 어렵습니다. 

살아보겠다고 그렇게나 애를 썼는데, 내가 왜 이 일까지 감당해야 할까 싶은 억울감으로 실제 신체에서 모호한 증상들을 경험하고 이를 스스로 화병으로 명명하기도 합니다.

 

자기 개념, 자기 표상이 손상될까 우려하는 기저에는 내 안의 싸움도 한몫을 합니다. 

연구들에 따르면 이상적 자아와 현실적 자아 간 간극이 클수록 피해 의식과 방어태세가 높아집니다. 

외부의 피드백들이 '가만히 잘 있는' 나를 자꾸만 툭툭 건드리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이때 이상적 자아에 한참 못 미치는 현실적 자아를 발견하게 되면 머릿속에서 이러저러한 실패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불쾌감과 당혹감이 치솟습니다. 

'내가 이러고 있을 사람이 아닌데, 이게 다 그 사람 때문에, 이전의 그 일들 때문에!' 

'내가 이걸 안 해서 못하는 것이지 못해서 못하는 게 아니에요. 지금은 상황이 좀 그래서 그냥 저도 에라 모르겠다 하는 거거든요.'

 

이렇게 응원군에게 지지를 요구하며 하소연을 하는 과정에서 모든 이야기는 자신의 불행감과 억울감을 중심으로 재편되고, 그 프레임에 갇힌 자신은 점점 더 피해자의 역할, 을의 위치를 공고히 합니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그러잖아도 위태로운 자기 이미지가 더 큰 위험에 처할지도 모르니 본인의 문제나 결함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전에, 혹은 가상의 가해자의 죄 없음이 밝혀지기 전에 선제적으로 박해받는 자의 역할을 취하여 주변의 감정을 먼저 뒤흔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소한 사건들에 불쾌감을 드러내고 억울해하는 것에 우리의 소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쓰고만 있다가는 이후의 삶이 실제로 억울해질 수 있습니다. 

과거의 단편이 당신의 미래 전체를 결정짓게 해서는 안 됩니다. 

5년 후의 시점에서 지금을 돌아보았을 때 내 억울함을 하소연하지 못했던 것을 후회할까 그 시간에 '뭐라도' 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할까 냉정히 살펴야 합니다.

 

설사 자신을 좌절시킨 대상이 실재한다 해도, 내가 그 고약한 대상을 바꿀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면 어느새 침투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외부귀인의 패턴을 재빨리 알아차려야 하며,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너 때문에 내가 불행해' ' 너만 아니었으면'과 같은 자동적인 이미지와 말들과 감정들이, 당신을 관통하든 스쳐 지나가든 그저 흘러가도록 내버려 둬야 합니다. 

거리를 두고 관조하면서, 이런 생각이 내 안에 떠올랐음을 인정하고 수용해야 합니다. 

억지로 통제하려 할 필요 없습니다. 

그거 요새 트렌드 아니에요.(*)

 

이때 다음의 신경 써야 할 몇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이상적 자기상을 세심히 파악해 그중 판타지 수준의 목표를 잘 찾아 떠나보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당신의 자기 지각이나 미래 예측이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욱 정확히는 이상적 자기를 설정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이상적 자기 자체를 굳이 설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당신이 높은 성취를 이룬다면 좋은 일이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 해서 당신의 가치가 내려가는 일은 없습니다. 

당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사진_픽셀

 

두 번째로는, 다른 사람은 뭐 하고 있나 자꾸만 살피며 분개하는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일단은 본인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 사람은 운이 좋았던 것/ 원가족만 아니었다면/ 이 불공평한 상황을 누가 알아줬으면 하는 생각들이 얼마나 하등에 쓸모없는 인지적 자원의 낭비인지를 빨리 알아차려야 합니다.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 바꿀 필요가 있는 것과 바꿀 필요가 없는 것을 부지런히 계산해야 합니다. 

이십 대 후반이 넘어가서까지 자신을 학대한 원가족에게 분노를 토로하고 있을 가치 없습니다. 

뒤도 돌아보지 마세요. 성인인 당신이 당신의 보호자입니다. 

또한 (이상적 자아가 있다면,) 그것이 현실적 자아와 어느 순간은 서로 수렴되기를 바라면서 그냥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세요. 

늘 이야기하지만, 아니면 말고요.

 

마지막으로, 자기 행동을 그나마 객관적으로 모니터링해주는 사람들이 부재하다면 이런 고질적인 외부귀인 패턴이 고착화되기 쉬우니 이 문제를 함께 다뤄줄 사람을 찾는 것도 중요합니다. 

자신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들이나 부정적인 피드백들이 자기를 시기, 질투해서 나오는 얘기라고 스스로를 응원하고 정신승리하고 있으면 안 됩니다. 

주변에서도/보호자들도, '네가 너무 잘나서 그래'-하며 모든 상황에 항상 그런 식으로 다독이지 말아요. 

그건 그냥 자아를 계속해서 기괴하게 가꿔주는 거예요. 

옆에서 단 한 명이라도 '지금은 억울해하기보다는 너를 들여다봐야 할 때'라며 담담하게 잡아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정말로 타인의 탓이라면 나중에 '조져버리면' 되고, 누구의 탓도 아니라면 이제 그 꼬인 생각들은 싹둑 끊어야 하며, 나의 탓이라면 그때부터 내 성장의 발판을 다시 조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생각해볼 거리는 이렇습니다.

나는 어떤 경우에 특히 입버릇처럼 남 탓을 해왔을까,
그것이 도대체 어디에 효과가 있었던 것일까,
내게는 과연 적기에 쓴소리를 해 주는 사람이 있을까,
혹은 나는 또 누군가에게 그런 기억일까,
천천히 돌아볼 것.

 

(*) 억제하려 할수록 사고는 더 강력한 힘을 얻는다는 '사고 억제의 반동 효과(rebound effect of thought suppression)'는 이런 수용 기법의 큰 근거가 되었지요. 

 

 

저자 약력_ 허지원 임상심리전문가, 정신건강임상심리사1급

중앙대학교 심리학과 조교수
대한뇌기능매핑학회 젊은연구자상 수상
한국임상심리학회 특임이사
한국인지행동치료학회 홍보이사
보건복지부 정신건강기술개발사업 "CBT기반 어플- 마성의 토닥토닥" 연구 책임자
한국연구재단 뇌과학원천기술개발사업 "정서조절 인공지능 모델 개발 II" 연구 책임자

 

* 글이 마음에 드셨다면 해당 글들을 책으로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 (저자 : 허지원)
  - 뇌과학과 임상심리학이 무너진 마음에게 건네는 따뜻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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