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허지원 고려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많은 심리학 서적들은 전통적으로 방어를 이야기합니다. 누군가는 후배의 일거수일투족이 미워 보이지만 차마 그렇게는 표현할 수 없어 '그 후배가 자신을 미워하는 것 같다'며 친구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는 투사(projection)로 자신의 악의를 숨깁니다. 누군가는 권위적 인물에 대한 분노로 들끓어도 그 앞에서는 반대의 의사표시를 절대 표현하지 않고 숨죽이다가, 만만한 사람에게 (주로 부인이나 자녀, 후배나 식당 종업원) 트집을 잡아 폭발적으로 화를 표출하거나 애꿎은 물건을 부수는 등의
[정신의학신문 : 허지원 고려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지금 방금 그 말, 무슨 뜻이에요?" 그날따라 A의 날 선 태도는 용도를 다 한 수세미의 올처럼 비교적 매끈했던 상담의 표면을 자꾸만 뚫고 올라왔다. A는 내가 건네는 안부 인사나 질문들이 무슨 뜻을 담고 있는지 반복해서 물었다. 그간 내게 과도하게 예의를 차린 관성으로 불쾌감을 누른다고 눌러대었지만 소용이 없었다."제 질문에 무슨 뜻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네요.""네. 뭔가 자꾸 돌려서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하실 말씀 있으시면 그냥 하시면 좋겠어요."오늘따라 A는 상담의
[정신의학신문 : 허지원 고려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사는 게 실제로 녹록지 않는 것이 맞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 중 열에 한두 개 정도만 우리가 간절히 바랐던 것이고 나머지 여덟 아홉 개는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그냥 일어나 버리는' 일들입니다. 일반 인구의 스트레스 수준이 실제로 점차 증가하고 있다는 연구결과들도 있고요. 사는 것을 더 힘들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는 우리의 의존성과 자존심 때문입니다. 마음을 아무리 비우려고 해도, 타인과의 관계에 몰두하며 '나 아니면 안 돼!' 하는 생각으로 과잉한 행동을 하기도 하고,
[정신의학신문 : 허지원 고려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저 같은 사람은 없을 거예요." A의 표정에 이름을 붙이자면, 어떤 날은 노여움이었고 어떤 날은 처연함이었다."다른 사람들이 제 이야기 들으면 웃어요. 어떻게 그렇게 사람 운이 없냐고.열심히 '으쌰 으쌰' 해보려다가도, 딴죽을 걸거나 엎어버리는 사람들만 있으니 점점 예민해지기도 하고, 한 번도 뭐가 수월하게 풀린 적이 없기도 하고요.어떤 날은 자다가도 이게 화병이구나 싶을 정도로 화가 올라오는데, 또 어떤 날은 이렇게 여기저기 치이는 게 내 팔자인가 싶어서 그냥 무기력하고요."
[정신의학신문 : 김병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결혼 후에 직장 생활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직장 생활을 5년 정도 했고 퇴사한 지는 2년째입니다.처음 3개월 정도는 후련하기도 하고 잠도 실컷 자니까 좋았는데,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이 생각 저 생각 잡념이 늘어나면서 살짝 우울해지기 시작했습니다.아직 아이는 없습니다.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까 최근에는 공허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고요.남편 뒷바라지와 집안일을 아무리 해도 성취감은 잘 느껴지지 않고 점점 자존감도 떨어집니다. 이런 마음을 남편에게 털어놓기도
[정신의학신문 : 허지원 고려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이번에도 안 될 것 같아요. 내가 알아요.” A는 심리치료를 하나의 퀘스트(quest. 게임 속 사용자가 수행해야 하는 임무)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듯했다."치료가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는 이제부터 함께 살펴봅시다."라는 말을 건네자, 이번에는 "열심히 해도 별다를 게 없으면, 그땐 어떻게 되나요."한다. 많은 경우 내담자는 치료에 대해 양가적(ambivalent)인 감정을 보인다.너무나 나아지고 싶지만 '실제로 증상이 나아져' 그간 나를 보살피던 사람들이 떠날까 싶어 두려워하고,
[정신의학신문 : 허지원 고려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굳이 자신의 모든 모습을 모두에게 다 보이고, 심지어 '바닥까지 다 보이고' 타인에게 수용되고 인정받길 바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봅시다. 여러분의 엄마는 과연 여러분의 모든 면을 다 사랑할까요?여러분 엄마도 여러분을 다 수용하지 못합니다. 구석구석 미운 점이 한두 개가 아니고요. (제 경우도 별다를 것 없습니다.)당신도 당신의 모든 면이 사랑스럽지 않아 자꾸만 타인에게 내어 보여 안심시켜주길 바라는 것이잖아요. 타인이 우리의 존재를 무조건적으로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정신의학신문 : 허지원 고려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내가 이래도 날 사랑해줄 거야? 너도 결국 떠날 거야?” A는 자기 문제를 잘 알고 있다며, 자신을 '애정 결핍이 있는 애착 장애'라고 했다. 단호하게 본인의 '병'을 명명하는 A는 남들에게 버려지는 것, 유기에 대한 불안이 높았다. A는 그 원인을 과거의 관계들에서 찾았다. "제가 왜 이러는지 알아요. 부모님이 맞벌이라 저를 돌볼 시간도 부족했고, 실제로 부모님 사이가 극도로 안 좋았어요. 제 앞에서 서로 소리도 지르고 가출도 하셨던 것 같고.간혹 좋을 때엔 저한테도 너무 잘해
[정신의학신문 : 대한불안의학회 임세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혜정씨는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만한 큰 회사의 콜센터에서 일하는 30대의 직장인입니다.목소리가 큰 사람이 결국엔 이익을 본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된 사람들이 매우 많은 대한민국의 콜센터에서 일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얼굴을 알 수 없는 전화기 건너편의 누군가가 다짜고짜 쏟아붓는 억지, 비아냥, 욕설, 협박이 예측할 수 없게 반복됩니다.출근을 할 때마다 오늘은 제발 악성고객(소위 말하는 진상)이 없기를 기대하지만, 매일 아침 첫 번째 전화를 받기 전까지 계속 느껴지
[정신의학신문 : 허지원 고려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나를 인정해달라는 이야기를 입 밖에 내어본 적이 있을까요?대부분은 말하지 못하는 말, 그러나 많은 경우 그 어떤 방법으로든 표현하고 있을 이야기. 학생들이 자존감이 과연 무엇인지 물을 때가 있습니다.로젠버그 자존감 척도로 유명한 Morris Rosenberg는, 자신에 대한 호의적인/비판적인 태도로 자존감을 정의했습니다.제가 자존감에 대해 설명할 때면, '계급장 다 떼고, 소위 스펙을 드러내지 않고 다른 사람과 마주했을 때, 내가 얼마나 매력적인 사람으로 보일지'에 대한 스스로의
[정신의학신문 : 허지원 고려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나를 인정해 줘” A는 저명한 한 NGO 단체의 이름을 말하며, 자신이 그곳의 사업 본부장이라는 이야기로 자신의 소개를 시작하였다.본인이 본부장 중에서 나이가 제일 어린 축이라며 조직도를 일일이 설명하거나, 봉사를 위해 결혼도 않고 그간 어떤 사업을 진행해왔으며 어떤 고난을 겪었는지 장황하게 설명하는 모습은, 마치 아침방송 프로그램에 나온 출연자 같았다.A가 없으면 그 부서는 식물상태나 다름없어 보였고, 그 헌신 덕에 부서의 실적도 좋은 편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본부장 승진 이
[정신의학신문 : 허지원 고려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자기선호, 자기수용, 자기가치감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외현적 자존감과, 비의식적이고 자동적이며 암묵적으로 누적되어 온 내현적 자존감이 동시에 모두 높을 수 있을까요?이 둘 모두가 높은 '안정적 자존감' 유형의 사람이, 성인군자 반열에 든 그런 사람들이 어딘가에는 있겠지요. 그러나 그게 저를 포함해서, 우리 대부분은 아닐 겁니다.반면 이 둘 모두가 일관되게 낮은 경우는 여러 미디어들에서 익히 접한 전통적 의미의 '자존감 낮은' 사람들이며, 만성적으로 열패감을 경험하고 타인의 칭찬에 어
[정신의학신문 : 허지원 고려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제가 다 부족한 탓입니다” A는 누가 봐도 꽤 매력적인 외모와 사회성을 가지고 있었고 업무 능력도 나쁘지 않았다. 다만 이 능력이 나쁘지 않은 정도였을 뿐, 딱히 두드러지지는 않았다.탁월한 재주라면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재주였는데, 어떤 일에든 '제가 부족해서 그렇지요', '제가 너무 몰랐습니다' 같은 이야기를 반복했다.심리치료 중에도 같은 일은 반복되어, A에게 여러 유사한 사건들에 대해 명료화나 해석을 해주려 하면, '그때엔 제가 다 부족했었지요. 진짜 제 탓이 맞네요.
[정신의학신문 : 허지원 고려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저를 포함해 우리 모두, 자신의 자존감은 상당히 낮다고 생각합니다.지각된 낮은 자존감은 우울증과 같은 기분장애, 강박장애와 불안장애, 자살사고와 시도, 역기능적인 사회적 기술, 빈약한 성취욕구, 혹은 반대로 극단적인 성취지향성 등에 기여하는 것으로도 밝혀졌지요.어떻게 해야 이 '자존감 문제'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요? 우리의 주양육자들은 심리학 교과서처럼 우리를 돌보지는 못했습니다. 주양육자가 짜증에 치받혀 감정적으로 반응할 때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그 화를 받아내야 했고, 혹은
[정신의학신문 : 허지원 고려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자존감이 너무 낮은 것 같아요." A는 면담 중 자신의 낮은 자존감에 대한 이야기를 반복해 말했다."제가 너무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게, 이런 사람들을 만나면 이렇게 행동하고, 저런 사람들을 만나면 저렇게 행동하고. 집에서의 제 모습과, 친한 친구들한테의 제 모습과, 직장에서의 제 모습이 또 달라요. 그러면 집에 돌아와서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어요. 너무 지쳐서. 냉장고 문을 열고 냉기를 쐬면서 서있던 적도 있었어요. 내가 쓴 가면의 온도를 떨어트려서 제 얼굴에서 떼어내자, 뭐 그랬
[정신의학신문 : 최명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Q. 지난달 21일에 동료 환경 미화원을 살해하고 동료의 카드와 전화기를 이용해서 수천만 원의 돈을 유흥비로 탕진한 용의자가 체포되었습니다.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면서 용의자가 피해자의 가짜 진단서를 위조하고 팩스로 휴직계를 제출하는 등 매우 치밀하게 행동한 것이 드러났습니다.A. 무척 치밀했죠. 그런데 범인은 단순히 자신의 죄를 덮는 행동만을 하지 않았습니다. 휴대폰 내용을 보고 딸들에게 용돈을 보내고 전화가 오면 목소리를 위조해서 전화를 받는 것처럼 행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피
[정신의학신문 : 허규형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P님의 사연 저는 어렸을 때 부모님께서 이혼을 하셨어요. 아버지는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분이셨어요.아버지는 제가 공부하는 것도 싫어하셨어요. 여자는 상고를 가서 남동생 뒷바라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이었죠.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학벌이 더 좋았던 탓인지, 아버지는 제가 성공하길 바라면서도 본인보다 잘나는 건 용납이 안 되는 그런 이중적인 잣대를 두셨습니다. 대학만 가면 끝날 거라는 생각으로 버텼어요. 하지만 대학 생활은 도서관과 알바가 전부였습니다. 매달 생활비와 월세를 벌어야 했
[정신의학신문 : 정재석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앞선 1/10강에서 해독(음독) 능력은 부족하지만 언어 이해력은 괜찮은 유형의 학생을 난독 유형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여기서 몇 가지 질문이 나오게 된다.첫 번째 질문은 도대체 얼마나 부족해야 난독증이라는 질병으로 판정하느냐이다. 아까 평균을 100으로 정하기로 했는데 평균의 80% 이하 즉 80 정도면 될까? 이하 아니면 70%, 60%......? 인간의 행동을 연구할 때도 항상 같은 문제를 만나게 된다. 얼마나 산만해야 질병으로 판정할 것인가, 얼마나 지능이 낮아야 지능이 부족하
[정신의학신문 : 이정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맷 데이먼의 어린 시절을 만날 수 있는 영화 '굿 윌 헌팅 (GOOD WILL HUNTING)'은 전 세계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낸 명작 중 하나로 꼽힙니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소중한 것을 찾아 떠나는 주인공의 모습은 관객들로 하여금 위로와 공감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일 텐데요. 정신과 의사의 입장에서 이 영화를 요약하자면 '윌 헌팅의 자존감 회복기'가 될 것 같습니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뛰어난 능력과 매력을 가지고도 일, 사랑 무엇 하나 제대
[정신의학신문 : 배문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자녀가 성장함에 따라, 부모의 역할은 지속적으로 변한다. 영아는 혼자 생존할 능력이 없으며, 부모의 돌봄에 전적으로 의지한다. 그들은 점차 걷는 법을 배우며 세상을 탐색하고, 언어를 통해 타인과 소통하게 되는데, 어린 시기의 아이는 여전히 부모의 돌봄과 훈육이 필요하다. 아이는 신체능력 및 사고능력이 자라면서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지고, 특히 청소년기를 거치며 부모로부터 독립적인 인격체로서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게 된다. 그리고 성인이 되면 부모는 자녀에게 수직적인 돌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