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나종호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나는 이제 호스피스 들어왔는데, 여기도 전쟁이네. 잘 가라. 내 몫까지 행복해라.”미국으로 떠나던 공항에서, 나의 이십 대의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한 희수는 핸드폰 너머로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불과 한 달이 되지 않아, 내가 세상에 태어난 날에 세상과 작별을 고했다.생일날 전해 들은 비보는, 자기를 잊지 말아 달라는 희수의 마지막 부탁 같았다. 기쁨으로 가득했던 나의 이십 대는 순식간에 빛바랜 기억이 되었고, 가장 행복했던 기억들을 떠올리는 것조차도 회상 후에 오롯이 기쁨으로
8화 우울하다, 불안하다 어느 날, 내가 살고 있는 오피스텔 복도에서 외침이 들렸다 “불이에요! 불이 났어요!”울먹임이 섞인 외침이 반복되고 나는 순간 멍했다가, 몇 초 후 정신을 차렸다. 중요한 것을 집어 들어야 했다. 마침 나는 샤워를 마치고 젖은 머리칼을 수건으로 두른 상태였다. 파자마를 손에 집히는 대로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휴대폰, 지갑, ‘하루(이때는 생강이가 식구가 되기 전이었다)’를 안고 뛰쳐나갔다. 1층 앞 대로에는 소방차가 길게 늘어서 있었다. 하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언제까지고 이대로 서있을 수는 없다고 판단
6화 나를 견디게 한 것들 - 3 집을 나와 가장 먼저 한 것은 실컷 울고, 자는 것이었다. 짜증이 나면 짜증 나는 표정을 지었고, 우울하면 울적한 표정을 지었다. 새 식구 중 누구도 나를 나무라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몇 마디 말로 껴안아줬다. 집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주었다. 그 이상을 바라지 않았다. 원룸에 다글다글 사람 셋과 강아지 한 마리가 살고 있었지만, 이상하게 좁지도 않았고 불편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집을 계약하면서 나오는 길에 건물 1층에 있는 화원에 들어갔다. 거기서 가장 번듯하게 서있는 고무나무를
2019년 12월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새로운 유형의 호흡기 감염질환인 코로나19가 빠른 전염력으로 대한민국은 물론 전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고 있습니다. 증상 및 예방 수칙 등에 대해서는 방송 및 언론 등을 통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지하고 있을 것입니다. 어떤 회사에서는 점심시간 캠페인으로 ‘묵언 식사를 합시다’를 하기도 하고, 어느 장소에서나 ‘악수하지 말고 인사합시다’, ‘사회적 거리두기’와 같은 캠페인을 통해 여러 사람과의 접촉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이 어려운 상황을 슬기롭게 대처해나가기 위한 방법들일 것입
[정신의학신문 : 박종석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건강한 직장생활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Hammer와 Zimmerman 등 많은 심리학자와 정신과 의사들이 수십 년간 연구한 결론은 일과 삶의 균형, 소위 말하는 워라밸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합니다. 업무 지향적인 회사보다는 가족 지향적인 회사가 각광을 받기 시작했고 복지제도는 직장을 선택하는 것에 있어 급여 이상으로 중요한 기준이 되었지요. 워크 & 라이프 밸런스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는 시간과 기회비용입니다. 일에 몰두하는 만큼 가정과 삶에 투자하는 시간이 줄어들기
바쁜 일상 속에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평상시 스트레스를 어느 정도 조절하는 것은 어렵지만 가능한 일입니다. 스트레스가 만병의 원인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서울대 행복연구센터에서는 ‘한국 사회와 울분’이라는 제목의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유명순 교수 연구팀). 한국 성인 남녀 20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로 약 15% 정도가 중증도 이상의 울분을 느낀다고 답했는데요. 정치·경제적인 수많은 문제들, 하루가 멀다 하고 나오는 끔찍한 일상의 뉴스들로 인해 스트레스는 하
[정신의학신문 : 김병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40대 중반 남자입니다. 불쑥불쑥 공허해집니다. 아이들은 공부하느라 바쁘고, 부모님은 연로하셔서 여기저기 많이 아프십니다. 아내는 바쁜 아이들과 쇠약해지신 부모님들을 보살피느라 정신이 없고, 저 역시 하루 종일 일만 하고 삽니다. 물론 이렇게 사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럽지만... 사는 게 허무하고 공허하다는 느낌이 자꾸 듭니다. 중년이 되면, 세상의 온갖 풍파를 다 겪고 마음이 단단해질 것 같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 웬만한 스트레스에는 끄떡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중년 남
[정신의학신문 : 부산서면 통통샤인정신과 이상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바다달팽이를 이용한 기억 연구로 노벨 의학상을 수상한 정신과의사인 에릭 캔델은 ‘기억을 찾아서’란 자신의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가끔씩 길고 피곤하고 유쾌했던 또 하루의 끝에 내 창 너머 허드슨 강이 어두워지는 걸 바라보며 과학자로서 살아온 날들을 회상하노라면, 나는 내가 하고 있는 일에 경이를 느낀다. 나는 역사가가 되려고 하버드 대학에 입학했고, 정신분석가가 되려고 그곳을 떠났으나, 결국 역사학과 정신분석학을 다 버리고서, 정신에 대한 참된 이해에
[정신의학신문 : 이두형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아무도 다른 누구에게 구원일 수는 없어요.'(김영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中) 누구나 연애에 관해서는 흑역사가 있다. 나의 경우에는, 어릴 적 오래도록 혼자 좋아했던 친구에게 했던 바보 같은 고백이 생각난다.‘내가 이렇게나 너를 좋아하니까, 너는 나와 사귀면 제일 행복할 거야.’혹시 이 글을 읽는 이 중에, 비슷한 식으로 고백을 하려는 이가 있는지. 만약 있다면 멘트를 조금 더 세련되게 정돈하기를 권한다. (경험 상, 결과가 그리 좋지 못했다.) 누군가를 좋
[정신의학신문 : 이두형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본 글은 자살 유가족 대상 강연 자료를 각색한 글입니다.) ‘여러 빈소에서 여러 죽음을 조문하면서도 나는 죽음의 실체를 깨닫지 못한다. 죽음은 경험되지 않고 전수되지 않는다. 아직 죽지 않은 자들은 죽은 자들의 죽음에 개입할 수 없고, 죽은 자들은 죽지 않은 자들에게 죽음을 설명해 줄 수 없다.’(김훈, 연필로 쓰기 中, 문학동네, 2019) 자의로든 타의로든 사람은 살며 자신의 경험을 남긴다. 사소한 일상은 책이 되고 노래가 되어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진다. 누구나 처음인 삶,
[정신의학신문: 부산서면 통통샤인정신과 이상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시인 윤동주는 ‘서시’에서 라고 노래했다. 그는 해방을 앞두고 1945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생체실험의 마루타가 되어 비참하게 죽어갔지만,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겠다는 삶의 태도는 죽어 있는 우리의 감성을 여전히 일깨워주고 있다. 삶의 문제에 좀 더 유연하게
[정신의학신문 : 이두형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학교 다닐 때 시험기간마다 내 가방은 참 무거웠다. 막상 공부할 때는 우등생 동기들이 십시일반 만들어 준 요약본(지금 돌이켜 생각해도 참 아름다운 문화였다.)도 겨우 봤지만, 집에서 책을 챙길 때는 강의록을 비롯해 한 해 동안 몇 번 열어보지도 않을 전공서적까지 바리바리 가방에 넣었기 때문이다.길면 3~4주, 많을 땐 1~2주 단위로 시험을 봤던 본과 시절에는 맘 편히 친구들과 놀러 갈 기회도 몇 없었다. 특히 다른 공부를 하는 친구들과 펜션에서 고기라도 구울라치면 대개는 여행 날짜와
[정신의학신문 : 이두형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점심 메뉴 선정은 언제나 힘들다. 제육을 먹자니 돈가스가 끌리고, 돈가스 집을 가려니 짬뽕이 눈에 아른거린다. 아직 남은 회식자리의 술기운을 지우자는 합리적인 이유 하나를 겨우 찾아 중국집으로 향한다.메뉴판은 또 다른 시련이다. 오로지 짬뽕만을 떠올리며 자신 있게 자리에 앉았는데, 옆자리에서 면치기를 시전하며 간짜장을 흡입 중이다. 불현듯 양파의 식감과 라드에 구운, 흰자가 조금 바삭한 계란 후라이의 고소함이 땡긴다. 해장에 무슨 짜장이야, 자신 있게 짬뽕을 시키려 했던 마음은 온데간
[정신의학신문 : 이상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 죽음에 가까이 갈수록 드러나는 일상의 소중한 가치를 주목하라.그룹 N.EX.T의 신해철은 노래를 통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질문은 지워지지 않네. 우린 그 무엇을 찾아 이 세상에 왔을까. 그 대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홀로 걸어가네. 세월이 흘러가고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 누군가 그대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어보면 대답할 수 있나? 지나간 세월에 후횐 없노라고. 그대여’라고 고뇌에 찬 질문을 던진다.나는 인생의 끝나는 시점에 지나간 세월에 후회는 없었다
[정신의학신문 : 이두형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얼마 전, 오랜만에 친구가 전화가 왔다. 자정이 넘은 시간, 2차 회식 자리를 파하는 중이라고 했다. 결혼식 사회를 맡겼을 정도로 듬직하고, 평소 자기 고민보다는 남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는 친구. 이 시간에, 이렇게 취해서 연락하는 건 꽤나 해결되지 않는 어려움이 있다는 거다.“알지? 나 3년 만에 겨우 취직한 거. 다른 애들은 회사 잘 다닐 때 혼자 공부하느라 힘들어서 취직만 되면 아무 걱정 없겠다 싶더니, 막상 취업하니까 오만 걱정이 다 드네. 이 일 계속할 수 있을까 싶고, 언
[정신의학신문 : 이상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내가 좋아하는 것’들의 노랫말 중에서 ‘개에게 물렸을 때, 벌에게 쏘였을 때, 자꾸만 슬퍼질 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떠올리면 기분이 조금 나아져요.’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힘들 때 내가 좋아하는 기억을 떠올리면 기분이 좋아지고 안정감을 얻는 경험은 어린 시절 엄마란 애착대상으로부터 받은 선물입니다. 누구에게나 행복했던 기억은 있습니다. 뿌듯한 감정을 느꼈던 일과 성취경험은 의미 있는 기억으로 저장되어 있습니다.슬럼프 상황에서는 현재의 절망적인 상황에 집중하
[정신의학신문 : 이두형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한참 일이 힘들 때 먹으며 스트레스를 풀곤 했다. 매운 떡볶이에 소시지와 치즈를 토핑해 먹고, 세계맥주를 마시며 편의점 닭다리를 뜯었다. 밤마다 인턴 동기들과 숙소에서 피자며 치킨을 먹었고 룸메이트와 중국집에서 1인 1요리를 시켰다. 식비는 꽤 부담이었으나 바빠서 다른 데 돈을 쓸 만한 시간이 없어서 괜찮았다.즐기던 운동들은 바빠서 그만두고 식사가 느니 급격히 몸이 불었다. 외모나 몸매 따위를 신경 쓰는 건 사치였다. 문제는 체력이었는데, 나이 탓도 있겠지만 예전에 비해 빠르게 지치고
[정신의학신문 : 유은정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옷차림이 얇아지고 메이크업도 가벼워지는 계절이 다가왔다. 다이어트의 시즌도 덩달아 찾아왔다. 남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고 자기 스스로의 모습을 사랑할 수 있는 단단한 마음을 장착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자기 외 다른 곳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무민라이프, 그리고 타인의 시선에 상관없이 내가 행복해야 한다는 욜로라이프 등 나에게 집중하는 전반적인 라이프 트렌드가 휩쓸고 있는 가운데 ‘자기 확신’이라는 키워드가 예전보다 더욱 필요하게 되었다. 과거에는 다른 사람들의 보편적인 기준에 얽매였다
[정신의학신문 : 이두형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당신은 어미 고양이다. 얼마 전 새끼 고양이 다섯 남매를 낳았다. 솜뭉치들이 야옹거리며 서로 엉켜 꼬물거리는 모습을 보는 당신은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그런데 다섯 번째 막내 아이가 유독 모자라다. 마당에서 잘 뛰놀다가도 혼자 사라지기 일쑤고, 밥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다. 다른 남매들에게 치여 밥조차 제대로 얻어먹지 못하고, 운동능력이 부족해 구덩이에 빠지거나 오른 나무에서 내려오질 못하는 등, 자꾸만 사고를 친다.오늘은 해가 져도 돌아오지 않는 막내 녀석, 불안해진 당신
저는 아마도 오랫동안 우울증을 겪고 있었던 것 같아요.아무에게도 힘들다는 말을 하고 싶진 않았지만요.사실은 혼자 짊어지고 있는 것에 한계가 오고 있었나 봐요. 불안함도 우울함도 스트레스도 많이 나아지고 있다고,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늘 불안 속에 살고 있었어요.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요. 그러다가 결국 어느 날, 몇 년 동안이나 생각만으로 해오던 일을 실행에 옮기게 되었어요.평범하고 맑고 추운 가을날이었요. 후드티 한 장만 걸친 채로 집을 나와 아무 생각 없이 서울 가는 버스를 탔죠. 버스 창 밖으로 반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