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약을 금방 끊고 싶은 / 끊고 싶지 않은 당신에게 “약, 어서 끊어야지.”내가 정신병원에 다닌다고 말하고 가장 많이 들은 말이다. 정신과 약이 마치 나를 지옥으로 안내하는 마녀의 약이라도 되는 듯이 다들 그렇게 터부시 했다. 나도 누군가 정신병원 약을 평생 먹으라고 권한다면 생각이 깊어질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마녀의 약보다 무서운 건, 사람들의 편견이었다. 예를 들어, 우울증, 불안증 환자가 매일 잠을 제대로 못 자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의사는 상담으로 수많은 제안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스트레스의 원인을 찾거나, 바깥 활
17화 일상을 지키는 일 고백하자면, 나는 머리 감는 일이 힘들다. 지저분하다고? 나도 알고 있다. 나는 꽤 긴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데, 한 번 머리를 감을 때면 스스로 어르고 달래고 혼내고 설득한다. 단순히 머리가 길어서는 아니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이 일반적인 사람들과 다른 점은 보틀넥(bottleneck : 장애물)이 있다는 것이다. 단순한 일상의 일들이 이유 없이 힘들거나 불가능해진다. ‘일상’은 ‘날마다 반복되는 생활’이고, 매일 해야 하는 일 중에서는 무의식적으로, 단순 반복적으로 해야 할 일들이 꽤 있다. 적당한 시
16화 지난 일주일, 어떠셨어요? “(지난 기간) 어떠셨어요?” 라고 상담을 시작한다. 그럼 나는 지난 며칠을 반추한다. “어…. 3일 정도 정도 우울증이 깊게 왔고요, 이런이런 일이 있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상담을 하면 내 위주로 말하게 된다.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럼 선생님은 “아… 그러셨겠어요.”라고 자꾸 그렇게 내 편을 드신다. 그러면 나는 우쭈쭈 당하는 어린아이처럼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자꾸자꾸 끄집어낸다. 막상 지난 일주일을 설명하는 건 쉬워 보이지만 참 어려운 일이다. ‘월 화 수 목 금
15화 지금 내 성격이 원래의 내가 아니라고요? “제 앞날은 다 망쳐진 것 같아요.”정신병원에 다닌 지 6개월쯤 됐을까? 나는 언제나처럼 괴로운 부분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지난주에는 하루 빼고 잠을 제대로 잔 적이 없어요”, “엘리베이터에서 공황 증세가 나타나서 중간에 내렸어요.” 등등 부정적이고 듣기에도 괴로운 얘기 투성이었다. 가끔 선생님께 미안한 날도 있었다. 저 사람은 하루 종일 저 자리에 앉아 나처럼, 혹은 나보다 더 심한 사람들의 푸념을 듣고 있겠구나. 생각하니 괜히 내 얼굴이 다 민망스러웠다. 선생님은
14화 이런 내가 정신병원을 가도 될까? - 2 예약한 날짜와 시간에 맞게 도착하자 내게 신분증을 요구했고, 신규 환자 접수 동의서에 사인을 했다. 건강보험처리를 할 것인지, 기록을 남기지 않기를 바라는지에 대해 물었다. 5년 안에 보험 가입할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건강보험처리를 했다. (신규 보험 가입 시 의료기록 조회는 최대 5년이다.) 꽤나 묵직한 설문조사지 같은 질문지를 받았다. 근래의 나의 상태를 체크하는 용도였는데, 1부터 5까지 중에 내 기분, 경험이 비슷한 것에 체크하면 되는 것이었다. 드디어 의사를 만났다. 젊은 의
13화 이런 내가 정신병원을 가도 될까? - 1 나는 당신을 알고 있다. 나는 당신이었기 때문이다. 우울증 비슷한 감정을 앓고 있지만 쉽게 주변 정신병원을 검색하지 못했다. 정말 ‘미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불쾌한 낙인이다.취업을 준비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더욱더 조심하게 된다. 병원 기록이 남으면 그걸 회사 측에서 알 수 있다는 소문도 있다. 유언비어이겠지만 지금은 뭐든 조심해야 할 시기이다. 굳이 불리한 일을 하기 싫다.우울증이 아닐 수도 있다. 이건 내 성격의 일부일 수도 있다. 그걸 착각하고 굳이 병원까지 찾아가는
12화 사람에게 상처 받은 당신을 위한 몇 마디 어디를 가야 당신을 만날 수 있는가. 나는 상처 받은 사람에게 수만 개의 단어보다 깊은 포옹을 한 번 해주고 싶다. 마음으로는 당신을 깊게 안아줘도 실제로는 불가능할 것이기에 너저분하게나마 글로 대신해 본다. 어느 날, 알고 지내던 S 동생이 연애상담을 하고 싶다고 진지하게 나를 불러냈다. 나에게 누구와 사귄다고 말은 안 했지만, 짐작하는 바가 있었다. 정작 만나니, 누구와 사귀었다고 쉽게 고백했고 그것은 상대방에게 강제 커밍아웃이 되어버렸다. 그렇다 그 둘은 여자였다. 나는 별스럽지
11화 운동하며 마주하기 나는 운동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런 나도 운동은 귀찮다. 어릴 때는 태권도를 했다. 꽤나 잘했다. 나보다 덩치가 큰 사람과의 대련에도 기죽지 않고 이겨냈다. 스트레스가 풀렸다. 한 시간을 제자리 뛰기 하며 동작을 이어나가면, 체력 소모가 컸다. 숙면에도 꽤 도움이 됐다. 그런 아이에게 초경이 왔다. 나는 초경과 운동이 무슨 상관관계를 맺는지 전혀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곧 알게 됐다. 태권도 도복은 새하얬고, 월경을 처음 겪는 나는 규칙적이지 않게 반복되는 여자들만의 사투를 남자들에게 들키기 싫었다. 얼마
10화 글을 쓰며 마주하기 글을 읽을 수 없었다.20대 후반 어느 날부터였다. 나는 크게 좌절했고, 화가 났다. 우울하고 불안한 것도, 자살하고 싶은 마음을 달래는 것도 힘에 부친데, 이제는 글도 읽을 수 없다고? 숨이 콱 막혔다. 선생님은 흔치는 않지만 우울증과 불안증의 증세가 영향을 준 것일 수 있다고 하셨다. 어릴 적부터 나와 책은 단짝같이 움직였다. 부모님께서는 책을 구매하는 비용에는 돈을 아끼지 않으셨다. “늦었는데 어디냐?”라고 전화하시곤 했는데, 서점이라고 답하면 방해하지 않으셨다. 집 앞에 작은 서점은 나의 단골 서점
9화 사랑은 생각보다 위험하다 모든 사랑은 숭고하고 동시에 위험하다. 나는 가족을 나보다 사랑했다. 그랬기에 희생했고, 양보했다. 가족도 나를 사랑했을 것이다. 그랬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나는 방치되었고, 늘상 희생해야 했으며, 돌봄 받지 못했다. 사랑은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순간에도 위험하다. 나에게는 가족이 그랬고, 누군가에게는 연인이, 누군가에게는 종교나 신념에 대한 사랑이 그러할 것이다. 나는 가족과 상호관계라고 생각해왔지만 지금 생각하면 일방적인 짝사랑 같은 것이었다. 항상 내가 부족해서, 책임을 다 하지 못해서 질책받는
[정신의학신문 : 나종호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나는 이제 호스피스 들어왔는데, 여기도 전쟁이네. 잘 가라. 내 몫까지 행복해라.”미국으로 떠나던 공항에서, 나의 이십 대의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한 희수는 핸드폰 너머로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불과 한 달이 되지 않아, 내가 세상에 태어난 날에 세상과 작별을 고했다.생일날 전해 들은 비보는, 자기를 잊지 말아 달라는 희수의 마지막 부탁 같았다. 기쁨으로 가득했던 나의 이십 대는 순식간에 빛바랜 기억이 되었고, 가장 행복했던 기억들을 떠올리는 것조차도 회상 후에 오롯이 기쁨으로
8화 우울하다, 불안하다 어느 날, 내가 살고 있는 오피스텔 복도에서 외침이 들렸다 “불이에요! 불이 났어요!”울먹임이 섞인 외침이 반복되고 나는 순간 멍했다가, 몇 초 후 정신을 차렸다. 중요한 것을 집어 들어야 했다. 마침 나는 샤워를 마치고 젖은 머리칼을 수건으로 두른 상태였다. 파자마를 손에 집히는 대로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휴대폰, 지갑, ‘하루(이때는 생강이가 식구가 되기 전이었다)’를 안고 뛰쳐나갔다. 1층 앞 대로에는 소방차가 길게 늘어서 있었다. 하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언제까지고 이대로 서있을 수는 없다고 판단
6화 나를 견디게 한 것들 - 3 집을 나와 가장 먼저 한 것은 실컷 울고, 자는 것이었다. 짜증이 나면 짜증 나는 표정을 지었고, 우울하면 울적한 표정을 지었다. 새 식구 중 누구도 나를 나무라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몇 마디 말로 껴안아줬다. 집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주었다. 그 이상을 바라지 않았다. 원룸에 다글다글 사람 셋과 강아지 한 마리가 살고 있었지만, 이상하게 좁지도 않았고 불편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집을 계약하면서 나오는 길에 건물 1층에 있는 화원에 들어갔다. 거기서 가장 번듯하게 서있는 고무나무를
2019년 12월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새로운 유형의 호흡기 감염질환인 코로나19가 빠른 전염력으로 대한민국은 물론 전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고 있습니다. 증상 및 예방 수칙 등에 대해서는 방송 및 언론 등을 통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지하고 있을 것입니다. 어떤 회사에서는 점심시간 캠페인으로 ‘묵언 식사를 합시다’를 하기도 하고, 어느 장소에서나 ‘악수하지 말고 인사합시다’, ‘사회적 거리두기’와 같은 캠페인을 통해 여러 사람과의 접촉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이 어려운 상황을 슬기롭게 대처해나가기 위한 방법들일 것입
[정신의학신문 : 박종석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건강한 직장생활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Hammer와 Zimmerman 등 많은 심리학자와 정신과 의사들이 수십 년간 연구한 결론은 일과 삶의 균형, 소위 말하는 워라밸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합니다. 업무 지향적인 회사보다는 가족 지향적인 회사가 각광을 받기 시작했고 복지제도는 직장을 선택하는 것에 있어 급여 이상으로 중요한 기준이 되었지요. 워크 & 라이프 밸런스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는 시간과 기회비용입니다. 일에 몰두하는 만큼 가정과 삶에 투자하는 시간이 줄어들기
바쁜 일상 속에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평상시 스트레스를 어느 정도 조절하는 것은 어렵지만 가능한 일입니다. 스트레스가 만병의 원인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서울대 행복연구센터에서는 ‘한국 사회와 울분’이라는 제목의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유명순 교수 연구팀). 한국 성인 남녀 20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로 약 15% 정도가 중증도 이상의 울분을 느낀다고 답했는데요. 정치·경제적인 수많은 문제들, 하루가 멀다 하고 나오는 끔찍한 일상의 뉴스들로 인해 스트레스는 하
[정신의학신문 : 김병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40대 중반 남자입니다. 불쑥불쑥 공허해집니다. 아이들은 공부하느라 바쁘고, 부모님은 연로하셔서 여기저기 많이 아프십니다. 아내는 바쁜 아이들과 쇠약해지신 부모님들을 보살피느라 정신이 없고, 저 역시 하루 종일 일만 하고 삽니다. 물론 이렇게 사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럽지만... 사는 게 허무하고 공허하다는 느낌이 자꾸 듭니다. 중년이 되면, 세상의 온갖 풍파를 다 겪고 마음이 단단해질 것 같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 웬만한 스트레스에는 끄떡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중년 남
[정신의학신문 : 부산서면 통통샤인정신과 이상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바다달팽이를 이용한 기억 연구로 노벨 의학상을 수상한 정신과의사인 에릭 캔델은 ‘기억을 찾아서’란 자신의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가끔씩 길고 피곤하고 유쾌했던 또 하루의 끝에 내 창 너머 허드슨 강이 어두워지는 걸 바라보며 과학자로서 살아온 날들을 회상하노라면, 나는 내가 하고 있는 일에 경이를 느낀다. 나는 역사가가 되려고 하버드 대학에 입학했고, 정신분석가가 되려고 그곳을 떠났으나, 결국 역사학과 정신분석학을 다 버리고서, 정신에 대한 참된 이해에
[정신의학신문 : 이두형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아무도 다른 누구에게 구원일 수는 없어요.'(김영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中) 누구나 연애에 관해서는 흑역사가 있다. 나의 경우에는, 어릴 적 오래도록 혼자 좋아했던 친구에게 했던 바보 같은 고백이 생각난다.‘내가 이렇게나 너를 좋아하니까, 너는 나와 사귀면 제일 행복할 거야.’혹시 이 글을 읽는 이 중에, 비슷한 식으로 고백을 하려는 이가 있는지. 만약 있다면 멘트를 조금 더 세련되게 정돈하기를 권한다. (경험 상, 결과가 그리 좋지 못했다.) 누군가를 좋
[정신의학신문 : 이두형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본 글은 자살 유가족 대상 강연 자료를 각색한 글입니다.) ‘여러 빈소에서 여러 죽음을 조문하면서도 나는 죽음의 실체를 깨닫지 못한다. 죽음은 경험되지 않고 전수되지 않는다. 아직 죽지 않은 자들은 죽은 자들의 죽음에 개입할 수 없고, 죽은 자들은 죽지 않은 자들에게 죽음을 설명해 줄 수 없다.’(김훈, 연필로 쓰기 中, 문학동네, 2019) 자의로든 타의로든 사람은 살며 자신의 경험을 남긴다. 사소한 일상은 책이 되고 노래가 되어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진다. 누구나 처음인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