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를 살았던 많은 철학자 중에 현대에 와서야 비로소 새로이 재조명을 받는 사람으로,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1632~1677, 네덜란드)가 있다. 그 시대는 주장만 할 뿐, 누구도 증명할 수 없는 철학의 테두리 안에 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지나간 시대의 보석들이 과학문명이 찾아낸 결과들과 연결되고 있다.스피노자는 뇌과학이란 말은 꿈도 꾸지 못할 그 시대에, 이미 심신병행론(심신일원론)을 주창하며 17세기를 주름잡던 데카르트Rene Descartes(1596~1650, 프랑스)의 심신이원론에 대응하는 이
[정신의학신문 : 이두형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한 중년의 남성이 진료실을 찾았다. 겉으로는 훌륭한 직장을 다니는 건실한 가장이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어린 시절 학대의 깊은 아픔이 있었다. 부모의 기분에 따라 반복해서 구타를 당했고, 집에서 쫓겨나거나 식사를 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이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 수많은 책을 읽어 왔고, 그 과거도 나름의 의미가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해 왔다고 했다. 그렇게 평생을 그 기억과 투쟁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이를 좋게 생각할 수는 없다고 했다.
23화 아직 나는 헤매고 있지만 “내가 원하던 삶은 이런 게 아니었어.”정말입니다. 나는 지금의 제 삶을 단 한 번도 원한 적이 없습니다.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도 없습니다. 상상해볼 수 있었다면, 조금 더 단단한 마음을 준비했을 겁니다. 금전적으로도, 재능적으로도, 삶의 모든 면들에서도 말입니다. 삶은 우리를 상상할 수 없는 곳에 던져놓고, 준비할 수 없게 만들어놓습니다.지금이면 다섯 번쯤은 졸업했을 대학원을 접어야 했을 때도 정말 많이 슬펐습니다. 제 열정이 그만큼 타오른 게 처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꼭 해보고 싶던 꿈을 접어
22화 우울한 당신에게 식물을 추천해요 - 2 우울하지만 밖으로 나갈 준비가 되셨다고요? 네, 좋습니다. 그런 당신에게도 식물을 추천하고 싶네요. 밖으로 나갈 준비가 됐는데, 정작 갈 곳 없는 경우도 참 난감하니까요.우선 식물을 구경해야겠죠. 양재동화훼공판장, 강남꽃도매상가, 종로꽃시장 등이 있습니다. 양재동은 절화(잘라진 꽃:우리가 일반적으로 꽃다발에서 보는 꽃)와 분화(화분에 심어진 식물) 화분들을 모두 판매합니다. 그중에서 분화가 더 발달되어있어요. 강남꽃도매상가는 이름대로 절화(꽃)를 주로 판매하고 있습니다. 또한 절화를 담
[정신의학신문 : 이두형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힘든 마음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이 많은, 그래서 위로의 메시지가 간절한 요즘이다. 인터넷의 글로, 책으로, 전문가의 입을 빌려 마음을 다독이는 이야기들이 범람한다. 그 글들은 대개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 담고 있다. ‘힘든 것들도 이렇게 보면 꽤 괜찮아. 모든 일에는 괜찮은 면들을 담고 있어. 너는 꽤 괜찮은 사람이야.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앞으로는 좋은 일이 가득할 거야. 다 잘 될 거야.’그런데 마음이 힘들 때 그런 문장을 읽으면 왠지 마음속에 그런 생각들이 따라온다. '정말
21화 우울한 당신에게 식물을 추천해요 - 1 겐차야자(Howea forsteriana) 오르피폴리아(Calathea orbifolia) 휘커스 페타올라리스(Ficus petiolaris) 칼라데아 퓨전화이트(Calathea fusion white) 혹시 이중에 알아보는 식물이 있나요? 식물 얘기를 시작하는데, 외계어 같은 이름부터 나열하니 겁부터 나시나요?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대부분이 외국에서 온 애들이라 이름은 낯설고 어렵습니다. 우선 제가 위에 아이들을 순서대로 보여드릴 테니 구경해보세요. 시원한 잎의 겐차야자부터 알록달록
20화 당장이라도 죽고 싶었다 - 2 집을 나온 뒤에 죽고 싶지 않아졌던 것은 아니다. 우울은 여전히 힘이 세서 나를 뒤흔들었다. 특히 병원에서 상담을 한 날은 감정 소모를 많이 해서였는지 많이 지쳤다. 내 힘들 때의 감정을 끌어내서 다시 마주한다는 것은 굉장히 소모적인 일이다.어떤 날은 상담에서 오해가 있는 말을 듣고, ‘아, 역시 내 잘못이구나’ 싶은 마음에 집에 돌아와서 한참을 운 적이 있다. 울다가 와인이 있다는 게 떠올랐고, 많이 마셨다. 그 순간, 죽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늦은 저녁이 다가왔고, K와 I가 술 마
[정신의학신문 : 의정부 성모사랑 정신과, 유길상 전문의] 와인 많이 좋아하시나요? 어렵게 느껴졌던 와인이 대중화가 많이 돼서 최근에는 백화점, 대형 마트뿐만 아니라 편의점에도 다양한 와인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와인과 관련된 최신 영화를 한 편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제목은 입니다. 우리는 와인이 유럽을 대표하는 술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와인을 소비하는 계층은 백인 중산층일 것이라고 은연중에 생각합니다. 하지만 영화는 첫 장면부터 이런 고정관념과 편견을 무참히 깨트립니다.20대 초반으로 보이는 흑인
[정신의학신문 : 이두형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한 청년이 진료실 문을 두드렸다. 수의사가 되기 위해 공부 중이었고, 성실함으로 주위 평판도 좋았으며 어울리는 친구들도 많다고 했다. 그런 그가 남모를 고민을 털어놓았다.“선생님. 실은 제가 초등학교 때 은따를 당했어요. 앞에서는 다들 저를 좋아하는 척하면서, 제가 없는 자리에서는 제 욕을 했던 거죠. 우연히 험담을 엿듣게 되었는데, 그게 제 이야기란 걸 깨달았을 때의 충격이 아직도 잊어지지 않아요.”“그 뒤로, 사람들이 같이 있을 때 저를 빼고 아이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하면 그 이야
19화 당장이라도 죽고 싶었다 - 1 이 글에는 우울증으로 자살하고 싶은 사람의 심리가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이런 종류의 글에 민감함을 갖고 계신 분은 이 글을 보시는 것을 자제해주세요. “죽고 싶다.”“정말 간절하게 죽고 싶다.”나는 진심으로 죽고 싶었다. 하루에도 수천 번 생각했다. 저번에 그 연예인은 어떻게 죽었다고 했지? 알아봐야겠어. 집은 좋지 않겠어. 레지던스 주인에게는 미안하다. 하지만 내가 집에서 죽고 나면 우리 집 식구들은 집을 잃는다. 시기는 언제가 좋은가. 봄 아니면 가을 겨울이 있다. 여름은 안된다. 내가
18화 약을 금방 끊고 싶은 / 끊고 싶지 않은 당신에게 “약, 어서 끊어야지.”내가 정신병원에 다닌다고 말하고 가장 많이 들은 말이다. 정신과 약이 마치 나를 지옥으로 안내하는 마녀의 약이라도 되는 듯이 다들 그렇게 터부시 했다. 나도 누군가 정신병원 약을 평생 먹으라고 권한다면 생각이 깊어질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마녀의 약보다 무서운 건, 사람들의 편견이었다. 예를 들어, 우울증, 불안증 환자가 매일 잠을 제대로 못 자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의사는 상담으로 수많은 제안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스트레스의 원인을 찾거나, 바깥 활
17화 일상을 지키는 일 고백하자면, 나는 머리 감는 일이 힘들다. 지저분하다고? 나도 알고 있다. 나는 꽤 긴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데, 한 번 머리를 감을 때면 스스로 어르고 달래고 혼내고 설득한다. 단순히 머리가 길어서는 아니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이 일반적인 사람들과 다른 점은 보틀넥(bottleneck : 장애물)이 있다는 것이다. 단순한 일상의 일들이 이유 없이 힘들거나 불가능해진다. ‘일상’은 ‘날마다 반복되는 생활’이고, 매일 해야 하는 일 중에서는 무의식적으로, 단순 반복적으로 해야 할 일들이 꽤 있다. 적당한 시
16화 지난 일주일, 어떠셨어요? “(지난 기간) 어떠셨어요?” 라고 상담을 시작한다. 그럼 나는 지난 며칠을 반추한다. “어…. 3일 정도 정도 우울증이 깊게 왔고요, 이런이런 일이 있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상담을 하면 내 위주로 말하게 된다.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럼 선생님은 “아… 그러셨겠어요.”라고 자꾸 그렇게 내 편을 드신다. 그러면 나는 우쭈쭈 당하는 어린아이처럼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자꾸자꾸 끄집어낸다. 막상 지난 일주일을 설명하는 건 쉬워 보이지만 참 어려운 일이다. ‘월 화 수 목 금
15화 지금 내 성격이 원래의 내가 아니라고요? “제 앞날은 다 망쳐진 것 같아요.”정신병원에 다닌 지 6개월쯤 됐을까? 나는 언제나처럼 괴로운 부분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지난주에는 하루 빼고 잠을 제대로 잔 적이 없어요”, “엘리베이터에서 공황 증세가 나타나서 중간에 내렸어요.” 등등 부정적이고 듣기에도 괴로운 얘기 투성이었다. 가끔 선생님께 미안한 날도 있었다. 저 사람은 하루 종일 저 자리에 앉아 나처럼, 혹은 나보다 더 심한 사람들의 푸념을 듣고 있겠구나. 생각하니 괜히 내 얼굴이 다 민망스러웠다. 선생님은
14화 이런 내가 정신병원을 가도 될까? - 2 예약한 날짜와 시간에 맞게 도착하자 내게 신분증을 요구했고, 신규 환자 접수 동의서에 사인을 했다. 건강보험처리를 할 것인지, 기록을 남기지 않기를 바라는지에 대해 물었다. 5년 안에 보험 가입할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건강보험처리를 했다. (신규 보험 가입 시 의료기록 조회는 최대 5년이다.) 꽤나 묵직한 설문조사지 같은 질문지를 받았다. 근래의 나의 상태를 체크하는 용도였는데, 1부터 5까지 중에 내 기분, 경험이 비슷한 것에 체크하면 되는 것이었다. 드디어 의사를 만났다. 젊은 의
13화 이런 내가 정신병원을 가도 될까? - 1 나는 당신을 알고 있다. 나는 당신이었기 때문이다. 우울증 비슷한 감정을 앓고 있지만 쉽게 주변 정신병원을 검색하지 못했다. 정말 ‘미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불쾌한 낙인이다.취업을 준비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더욱더 조심하게 된다. 병원 기록이 남으면 그걸 회사 측에서 알 수 있다는 소문도 있다. 유언비어이겠지만 지금은 뭐든 조심해야 할 시기이다. 굳이 불리한 일을 하기 싫다.우울증이 아닐 수도 있다. 이건 내 성격의 일부일 수도 있다. 그걸 착각하고 굳이 병원까지 찾아가는
12화 사람에게 상처 받은 당신을 위한 몇 마디 어디를 가야 당신을 만날 수 있는가. 나는 상처 받은 사람에게 수만 개의 단어보다 깊은 포옹을 한 번 해주고 싶다. 마음으로는 당신을 깊게 안아줘도 실제로는 불가능할 것이기에 너저분하게나마 글로 대신해 본다. 어느 날, 알고 지내던 S 동생이 연애상담을 하고 싶다고 진지하게 나를 불러냈다. 나에게 누구와 사귄다고 말은 안 했지만, 짐작하는 바가 있었다. 정작 만나니, 누구와 사귀었다고 쉽게 고백했고 그것은 상대방에게 강제 커밍아웃이 되어버렸다. 그렇다 그 둘은 여자였다. 나는 별스럽지
11화 운동하며 마주하기 나는 운동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런 나도 운동은 귀찮다. 어릴 때는 태권도를 했다. 꽤나 잘했다. 나보다 덩치가 큰 사람과의 대련에도 기죽지 않고 이겨냈다. 스트레스가 풀렸다. 한 시간을 제자리 뛰기 하며 동작을 이어나가면, 체력 소모가 컸다. 숙면에도 꽤 도움이 됐다. 그런 아이에게 초경이 왔다. 나는 초경과 운동이 무슨 상관관계를 맺는지 전혀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곧 알게 됐다. 태권도 도복은 새하얬고, 월경을 처음 겪는 나는 규칙적이지 않게 반복되는 여자들만의 사투를 남자들에게 들키기 싫었다. 얼마
10화 글을 쓰며 마주하기 글을 읽을 수 없었다.20대 후반 어느 날부터였다. 나는 크게 좌절했고, 화가 났다. 우울하고 불안한 것도, 자살하고 싶은 마음을 달래는 것도 힘에 부친데, 이제는 글도 읽을 수 없다고? 숨이 콱 막혔다. 선생님은 흔치는 않지만 우울증과 불안증의 증세가 영향을 준 것일 수 있다고 하셨다. 어릴 적부터 나와 책은 단짝같이 움직였다. 부모님께서는 책을 구매하는 비용에는 돈을 아끼지 않으셨다. “늦었는데 어디냐?”라고 전화하시곤 했는데, 서점이라고 답하면 방해하지 않으셨다. 집 앞에 작은 서점은 나의 단골 서점
9화 사랑은 생각보다 위험하다 모든 사랑은 숭고하고 동시에 위험하다. 나는 가족을 나보다 사랑했다. 그랬기에 희생했고, 양보했다. 가족도 나를 사랑했을 것이다. 그랬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나는 방치되었고, 늘상 희생해야 했으며, 돌봄 받지 못했다. 사랑은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순간에도 위험하다. 나에게는 가족이 그랬고, 누군가에게는 연인이, 누군가에게는 종교나 신념에 대한 사랑이 그러할 것이다. 나는 가족과 상호관계라고 생각해왔지만 지금 생각하면 일방적인 짝사랑 같은 것이었다. 항상 내가 부족해서, 책임을 다 하지 못해서 질책받는